[칭찬릴레이] 이본건설 대표 서대근씨
[칭찬릴레이] 이본건설 대표 서대근씨
  • 정준모 기자
  • 승인 2023.05.17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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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본건설 대표 서대근씨

사회는 부양해야 할 자식과 같은 것

 
 우리 주변에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남모르게 물질·육체적으로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본보가 소개하는 국제라이온스 355-E지구 군산지역 부총재 겸 이본건설 서대근 대표(53·군산시 나운동)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여태껏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그냥 지나친 법이 없는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사람.

 서 대표의 이웃사랑 실천방법은 독특하다. 지나칠 만큼 자신의 신분 노출을 꺼리기 때문이다.

 정식 인가난 복지시설보다는 비교적 사랑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을 찾아 선행을 베풀고 있다.

 그는 십 수년째 자신이 피땀 흘려가며 힘들게 번돈을 소외계층과 도움이 절실한 곳에 많게는 수천만원씩 적어도 매년 평균 1천만원 이상을 흔쾌히 기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흔한 전달사진이나 영수증 한 장 받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왜 그런 것들이 필요하냐고 반문한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국제라이온스 355-E지구 군산지역 부총재 활동

매년 많게는 수천만원씩 남을 위해 쓰면서도 그 흔한 기념사진 한장 찍지 않는 사람 

  서대표를 취재하기 위해 몇날 몇일을 애를 먹어야만 했다. 그가 막무가내로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야심한 밤을 타 서대표 자택을 급습해서야 마침내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엔 입도 벙긋 않던 그가 “왜 나쁜 일도 아닌데 고의로 회피하느냐?”는 계속된 질문이 이어지자 마지못해 한마디 던졌다.

 “예수님께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할 재물을 전달할 사람으로 저를 선택한 것 뿐이며 저는 단지 예수님을 대신해서 심부름만 했을 뿐입니다”

 서대표의 답변은 의외로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행동 철학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물질적으로 얼마간의 도움을 주고 있을지는 몰라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자매들을 위해 대소변이나 목욕을 거두는 육체적으로 힘든 봉사를 베푸는 봉사자들에 비하면 분명 선택받은 사람이라는게 그의 지론.

 서대표의 이웃사랑 실천은 늘 이런식이었다.

 하지만 서대표도 영원히 지울 수 없이 큰 마음의 상처를 받은 기억이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좋은 일 한답시고 아무런 뜻 없이 한일이 ‘세인들의 입방아’에 올랐던 것이다.

 “지난 1994년께 일겁니다. 양지가 들어 노년에 전원주택 지으려고 어렵사리 장만한 비행장 3거리 부근의 몇십평을 아무런 조건없이 경로당 부지로 기부했더니 ‘혹 정치에 뜻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냐’는 등 여기저기서 쑥덕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가슴이 아프더군요. 마치 제가 뭐나 바라고 사심있는 사람처럼 비친다는 사실이”

 그나마 나서고 내세우길 싫어해 용건만 마치고 바람처럼 사라졌던 서대표는 이때부터 아예 양로원 등 불우이웃시설 등을 도울때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우곤 했다.

 특히 서대표는 연초를 맞아 대충 자신의 수입 규모를 감안 불우이웃돕기 예산 범위를 짜고, 대상자는 자신이 직접 선택하기 보다는 주변의 神父나 제3자의 추천을 받는다.

 그는 “10년 가까이 이러다 보니까 괜한 오해 받을 일도 없고 해서 마음이 편하긴 한데 다만 가난한 이웃들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서대표가 사업이 번창해 돈을 많이 벌거나 물려 받은 재산이 많아서 사회사업을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고생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이골이 날 만큼 해본 사람이 서 대표이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 

 서대표는 1949년 포목점을 운영하신 조부 서정선옹(1997년 작고 당시 95세)의 일을 돕던 부친 서복수씨(1950년 사망) 장남으로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6.25 동란은 그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가 돌을 맞자마자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비록 좁의 세심한 보살핌이 있었지만 그는 형제 하나 없는 외톨이 신세가 됐다. 조부가 구박하거나 미워한 것도 아닌데 군산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서씨는 독립선언을 하고 무작정 집을 뛰쳐 나온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일궈보고 싶은 욕망이 그의 끓는 피를 부추겼다. 그렇지만 용기백배 막상 집을 나섰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서 대표인지라 우선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몸으로 때우는 공사현장 잡역일 뿐이었다.

 그가 첫발을 내디딘 것은 군산화력발전소 현장의 전기잡역부였다. 하지만 그게 오늘날 군산미군기지 내에서 인정받은 한국 기술자로 번듯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미친듯이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일을 위해서라면 떠돌이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다. 서울 당인리 발전소나 인천호력발전소가 서씨의 눈물과 땀이 진하게 베어 있는 곳이다.

 고생도 진절머리나게 했다. 그 가운데서도 서씨는 인천화력발전소 건설현장을 잊지 못한다. 오지인 탓에 숙식을 해결하던 현장 주변엔 변변한 식당 하나 없어 점심을 제외하곤 아침과 저녁 두끼니를 라면으로 때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때 라면이 입에 물어 지금도 라면만 보면 신물이 날 정도다. 또한 세수하는 것 조차 사치일 정도로 물이 없어 제대로 씻지못해 몸에서는 심한 악취가 진동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돈이라도 듬뿍듬뿍 벌리는 것도 아니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했으나 객지를 전전하다 보니 수중에 남은게 없었다.

 그러나 고생 대신에 얻은 값진 기술 덕분에 1974년 당시 직장으로선 파격적인 대우를 받아 주위의 선망대상이었던 군산미군기지에 전기기능공으로 취업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워낙 근면한데다 타고난 성실함 때문에 업계의 신망과 신뢰를 한몸에 받?다.

 이 덕분에 그는 1976년 현재의 부인인 박선애씨(46)를 소개 받아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이듬해부터는 하도급 회사로부터 일감을 맡은 업자로 변신을 하게된다.

 당시 전기계통에선 서 대표 처럼 밑바닥부터 쌓아올린 기술력과 종업원들의 마음까지 읽을 줄 아는 경험있는 사람이 드물었기에 서 대표는 승승장구했다. 비록 몇차례의 우여곡절을 겪긴 했어도 그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어느정도 자신의 앞가림을 할 처지가 되자 그는 자신에게 얻어진 행복만큼 어려운 이웃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주로 모자시설 등을 중심으로 도왔다. 그는 수시로 옷이며 양말, 간식 등을 흔적없이 전달했다. 예를 들면 전화를 걸어 수용인원을 물어본 뒤 사람 숫자 만큼 배달시키는 그런 식이었다.

서대근 대표와 부인 박선애씨와 단란한 모습
서대근 대표와 부인 박선애씨와 단란한 모습

 무엇보다도 그의 이웃사랑에는 모태신앙이 크게 작용한 듯 싶다.

 그의 집안은 내력있는 천주교 집안으로 서 대표도 지난 1992년부터 1997년까지 군산시 나운동성당 사목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실제론 슬하에 2남1녀를 둔 그이지만 자신의 자녀는 4명이라고 우긴다. 한명의 자녀는 곧 ‘社會’라는 것.

 그는 힘 닿는데 까지 열심히 일해서 자식들을 거둘듯이 사회에도 환원하고자 하는 소박하면서도 일반인들이 감히 따라서 할 수 없는 숭고한 마음을 품고 있다.

 끝으로 ‘음지에서 묵묵하게 봉사활동을 펼치는 사람도 부지기수“라면서 ”이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는 그의 말에서 진정한 삶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아울러 진정한 봉사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군산 정준모 기자
 2002년 5월7일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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