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는 완판본 문화상을 제정하라
전주시는 완판본 문화상을 제정하라
  • 서정환 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이사장
  • 승인 2022.05.2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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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환 신아출판사 대표
서정환 신아출판사 대표

전주의 자랑을 하나 들어보라면 먼저 완판본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한옥마을이나 경기전, 또는 전동성당을 떠올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더러는 전라감영이며 전주비빔밥과 전주부채, 전주한지 등을 내세우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가져갈 수도 없는 완판본이야말로 전주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완판본은 조선 후기 숙종연대부터 일제 말기 1930년대까지 전주에서 간행된 국문 소설의 목판본을 말한다. 특히 판소리 계열의 소설로 전라도 향토색이 짙은 ‘열녀춘향수절가’를 비롯하여 심청전, 홍길동전, 구운몽, 유충열전 등등 많은 국문 소설책을 간행, 시중에 판매한 것이다. 당시에는 책을 유통시키는 책방을 조정에서 허용하지 않아 장터가 아니고는 유통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전주 인쇄·출판인들이 국문 소설책을 만들어 시중에 많이 팔았다는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완판본 책을 통해 서민들의 머리를 깨우치게 하는 훌륭한 문화 보급을 한 것이다. 이것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언문이라 해서 최만리 등 성균관 유생들이 반대하고 관리며 양반들이 폄하하는 국문 소설책을 시중에 유통시킨 일이야말로 문화 보급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우리의 완판본이 전주 사람들의 자긍심에 힘을 더하게 하는 것은 조선시대에 경판본(京板本)과 쌍벽을 이루었던 완판본(完板本)의 고장이 전주였다는 점. 그리고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이 서울이었던 조선조 말에 유일하게 서울과 겨룰 수 있는 출판문화를 이룩했다는 이 사실에 우리 전주 시민들은 긍지를 가지고 있다.

전주시는 완판본이 자랑스럽다면서도 너무 소홀하게 대접하고 있어 안타깝다. 완판본문화관을 건립한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너무 볼품없이 꾀죄죄한 모습이다. 너무 초라하다. 내용물은 형식만 갖춰놓고 전시를 하고 있는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무리 재정이 어렵다고 해도 이럴 수가 있는가 싶다. 집 한 채를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고 담을 터놓아 마당이 넓게 보이도록 하는 궁색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낯이 뜨거워진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마지못해서 해놓은 일처럼 보인다”고 말한 것은 몇 사람이 문화관을 같이 구경하고 나오면서 한 말이다.

이웃 청주에서는 흥덕사지에서 발굴된 금속활자를 가지고 인쇄박물관을 훌륭하게 지었다. 그 지역에서 간행된 고서, 목판, 활자까지 수집,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다. 또한 ‘직지(直指)문학상’을 제정, 전국적으로 상을 공모하여 당선작을 책으로 발행하여 대대적으로 청주를 홍보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는 무슨 문학상, 문화상 등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는 그저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할 것인가.

전주시는 올해 ‘책의 도시’를 만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대대적으로 도서관을 여러 곳으로 확장하는 한편 버스를 이용, 도서관여행을 진행하고 있어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차제에 전주시가 완판본 문화상을 제정, 전국을 상대로 공모하기를 제안한다. 훌륭한 완판본문화를 널리 알리고 인쇄·출판문화 산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의지만 가지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원은 물론 전 시민이 원하는 일이라고 감히 외치는 것이다.

6·25 한국전쟁과 4·19, 5·16 혁명의 격변기를 어렵게 지나오면서도 완판본은 꾸준히 맥을 이어 왔다. 1960년대에 당시 서울대학교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주에서 ‘산문시대(散文時代)’라는 동인지를 간행하게 된 것은 인쇄·출판 인프라가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문시대??는 기성세대의 문학적 권위와 화법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감수성을 우리 문단에 도입한 공적이 크다는 평가를 받았고, 4집, 즉 네 번을 전주에서 출간했다.

전주는 오늘날에도 완판본의 맥을 이어오면서 출판의 고장임을 자랑하고 있다. 소설가 김동리 선생의 전집 33권이 전주에서 출간되었고, 오발탄의 작가 이범선 선생 전집 39권도 완판본의 고장 전주에서 출판되었다. 현재도 전국의 시인, 소설가, 수필가들이 전주에서 책을 출간하고 있다. 이렇게 완판본은 연면히 맥을 이어오고 있다.

완판본은 단순한 책 보급이 아니었다. 서민들을 일깨운 문화의 보급이었다. 이 중차대한 일을 완판본이 해낸 것이다. 완판본을 소홀이 대접해서는 안 된다. 우리 전주가 대접하지 않고 누가 할 것인가.

서정환<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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