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전북여성문인] 목경희(1927~2015) 수필가(하) 새벽 어스름을 뚫는 발자국 소리
[내가 사랑한 전북여성문인] 목경희(1927~2015) 수필가(하) 새벽 어스름을 뚫는 발자국 소리
  • 김용옥 시인
  • 승인 2021.04.28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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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경희 선생 얘기라면 밤 내내 조잘거릴 일이 그득하다. 글로 기나긴 한 생을 자랑하긴 참으로 힘들다. 선생은 1981년 서울생활 시절에 <<현대한국수상록전집>>에 수필 10편이 게재되었으니, 전북의 여성 수필가로서 처음이었다. 그리곤 딸의 암 투병에 애를 태우면서, 1987년까지 선생은 야윈 삭정이처럼 지내셨다.

  그리고 1991년 한여름. 모녀의 ‘병상 산문집’ <<분홍옷 갈아입고 꽃길을 가네>>를 출간하였다. 나는 대학생 딸애와 딸 친구를 데리고 광진아파트로 갔다. 온종일 봉투에 주소를 쓰고 책을 넣고, 봉투를 종이테이프로 부치고 줄줄이 묶어, 우체국까지 실어날랐다. 그리곤 삼겹살에 소주를 달게 마셨다. “이제 우리 혜신이를 진짜 떠나보내는 거네!” 하시는 선생과 함께 훌쩍거렸다. 이 책으로 ‘한국크리스천문학상’을 수상하셨다. 짝짝짝

  그리고 출판기념회를 했다. 완산교회 염 목사님과 수필문학사 강석호 수필가를 처음으로 인사드렸다. 나는 선생의 따님 혜신 씨 대신 안내를 맡아 온종일 봉사했다.

  선생은 지금, 전북 진안 부귀면 ‘전주공원묘소’에서 영면에 들고 있다. 2015년 11월 29일. 선생의 두째며느리의 전화를 받고 전북문단의 어른이 모였다. 허소라, 서재균, 김남곤, 이운룡, 이목윤, 조기호, 김용옥이 추어탕으로 점심을 하고 산소로 갔다. “목경희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샘들을 모시는 밥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나는 선생의 마지막 길을 이렇게 애도하였다. 얼마나 ‘밥 한 그릇’ 함께 나누기를 좋아하셨는데!

  1969년이었을 게다. 양장점 ‘순미사’를 경영하던 선생은 전북 최초로 패션쇼를 펼쳤다. 선생은 개척자이며 생각을 실현하는 자였다. 우리나라에 ‘제1회 목화 아가씨 모델 선발대회’가 치러진 후였다. 당선자 모델 보라미 씨는 전북사람으로 당연히 초대되었다. 목경희 여사는 뜻을 세우면 참 멋지게 실행했다. 진실로 앞서가는 여성이었다.

  위아래 친지들은 여러 가지로 선생을 호칭했다. 목 선생, 목 여사, 목 언니에 목 사장도 선생의 별칭이었다. 선생은 ‘전주의 명동’이라던 중앙동에 4층빌딩을 지어 4층에 ‘경희 쌀롱’을 열어 양식음식점이 없는 전주에 경양식집을 개점했다. 그곳에서 OB맥주와 함께 햄벅스텍을 써는 맛은 일종의 째=멋내기였다. 목 사장의 활달하고 앞선 개척정신 덕이었다.

  그때 그분들 모두 목 선생과 함께 천상에서 노니실까. 김옥생, 이기반, 최진성, 황길현 선생이 오락가락하신다. 김순영, 김숙 선생의 “목언니, 목언니”부르는 목소리가 쟁쟁히 들린다.

  선생의 문학에 대한 집념은 끊기지 않았다. 아니, 진정 그의 살아가는 힘이었을 게다.

  그리고 1997년에 <<길바보의 고백>> 이후로 <<우선처럼 양산처럼>>, <<새끼손가락>>을 줄줄이 출판. <<그리움의 나라>>를 발간하여 16회한국수필상(한국수필가협회 주관)을 수상했다.

1991년 열린 목경희 박혜신 모녀 산문집 '분홍옷 갈아입고 꽃길을 가네' 출판기념회에서 목경희(오른쪽에서 세 번째)와 그 옆으로 김혜미자, 김남곤, 김용옥씨가 보인다.
1991년 열린 목경희 박혜신 모녀 산문집 '분홍옷 갈아입고 꽃길을 가네' 출판기념회에서 목경희(오른쪽에서 세 번째)와 그 옆으로 김혜미자, 김남곤, 김용옥씨가 보인다.

  1980년대 그때. ‘전북일보’에서 의학박사 유승국 선생의 박학다식한 칼럼과 목경희 선생의 칼럼을 쌍벽으로 애독했다. 동인지 <전북문학>과 <전북수필>에서도 땀땀이 읽었다. 어휘력이 풍부하고 지적인 글로 여성문학의 위상을 높여주셨다.

  앞서간 여성 문사에 얽힌 얘기를 쓰려니 모친의 충고가 들려온다. “좋은 머리의 기억보다 무딘 연필이 낫단다!” 할 일 많고 바쁜 생활에 낱낱이 기록해 놓질 않았으니, 머리와 가슴속에선 살아있으나 날짜, 장소명, 명칭 같은 건 기억 저편에 묻혔다. 그러나 괜찮다! 목경희 여사는 진짜 문사였고 이만큼이라도 남길 만하니까.

  “요새는 문인들이 흔하기도 해라. 그러건만 글다운 글이 없네!”하고 한숨짓던 선생의 말씀을 명심한다. 안도현 시인과 나의 시를 외고, 성경을 줄줄이 설명하고, 내 가족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신다던 선생이 그립고 그립다. 만년 20년쯤은 모악산 아래 집을 지어 김갑순 수필가랑 셋이서 나란히 살자 하시더니 두 분 다 지수화풍으로 떠나셨다. 문단이 쓸쓸하다.

  선생께서 티셔츠를 사주신 날부터 내리 전화를 드렸다. 어느 날 아침엔, 선생이 스스로 이상하다는 거라. 며느리가 온다고 했다. 그리고 사흘간 불통이던 스마트폰을 둘째며느리가 받았다. 교회 권사님들을 못 알아보고 식사도 거절하시니 내방을 하지 말란다. 그러나 달려갔다.

  전북대학병원의 엘리베이터 문간에서, 나를, 먼저 알아보셨다. “어라? 용옥이가 왔어, 김용옥이가 왔어!” 그리곤 아드님 손을 놓고 내 손을 잡고 함께 병실로 들어갔다. 음식을 거부하는 중이라던 선생은 ‘대대손손 누룽지’를 오독오독 씹고 오렌지 주스 두 모금을 맛나게 드셨다.

  살아계실 땐, 그게 마지막이었다. 가끔 선생께 올린 편지를 읽어본다. 선생의 수필집 여기저기를 펼친다. 참 잘 쓰셨다. 선배 여성 문인이 자랑스럽다.

 

 글 = 김용옥(시인, 수필가, 국제펜한국위원회 이사)

  

 ※김용옥 수필 ‘내가 사랑한 전북여성문인’은 격주 목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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