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독립운동가 호암 문일평
5월의 독립운동가 호암 문일평
  • 이보원기자
  • 승인 2003.04.29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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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1888. 5. 15∼1939. 4. 3)

국가보훈처는 문일평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평북 의주에서 남평(南平) 문씨 무관가문의 재력가집안의 외아들이

었던 선생(1888.5.15∼1939.4.3)은 18세때인 1905년까지 의주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그러나 고향에 교회가 설립되고 서양문화를 접한

선생은 러일전쟁을 목도하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단발을

한 뒤 일본에 유학했다.

1910년 3월 귀국한 선생은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의 대성학교를 시작

으로 의주의 양실학교, 서울의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국

권회복을 위해 비밀결사로 조직된 신민회에 참여했다.. 이듬해 봄

선생은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재동경조선

유학생친목회의 기관지인 ‘학계보’(學界報)를 편집하고 김성수·안

재홍·송진우 등과 교유했다. 1912년 말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상

해에서 신규식이 주도하던 독립운동단체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면

서 동제사에서 설립한 박달학원(博達學院)의 교사로도 활약했다. 상

해에서 박은식·신채호와의 만남은 선생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미

쳤다.

1914년 봄 이후 고향에 은거하면서 독서에 전념하던 선생은 1919년

에 3·1운동이 발발하자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는 상황에

서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3월 12일 서울 보신각에서 시위군중 앞에

서 낭독하다가 체포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출옥한

선생은 중동학교와 송도고보, 배재고보, 중앙고보 등 여러 학교에

서 역사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노동대회 교육부장, 신간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간사,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등으로 민족운동에 끊임없

이 참여했다.

1933년 4월부터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재직한 선생은 조선일보에

여러 편의 사화(史話)와 사론, 수필 등 한국사 관련 글들을 게재하

여 역사지식의 대중화에 노력하는 한편 ‘조선심(朝鮮心)’과 ‘조

선정신’을 강조, 민족주의 역사학의 확립에 기여했다. 1934년 5월

에는 일제의 식민사학에 맞서 실증적 학풍을 주장하면서 진단학회

가 창립되자 이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선생은 1939년 4월 3일에

향년 52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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