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80년대, 그리고 5월
70년대, 80년대, 그리고 5월
  • 이성순 유한회사 효원 대표/법무사
  • 승인 2021.05.09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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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순 유한회사 효원 대표/법무사

 1970년대에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내게 있어 ‘민주주의’라는 것은 미국이나 서유럽의 먼 꿈나라의 이야기였다. 신문 지상을 통하여 접하던 백악관 앞에서의 데모라는 것도 너무나 생경스러운 장면이었고, 자기 나라의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그들의 신문 만평은 당시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였다. 그 시절 우리들이 모셨던(?) 대통령은 신과 같은 존재였고, 역사적으로는 세종대왕보다 더 위대하였으며 영원불멸의 대통령으로 각인되던 시기였다.

 반공은 이 나라의 국시였으며, ‘국민총화’라는 일본식 표현에는 수월한 통치에 저해가 되는 여하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를 어기는 언동을 하는 경우에는 거의 국사범으로 다스리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그 유명한 오영수 작가가 전라도를 비방하는 내용이 가미된 ‘특질고’란 단편수필 하나로 거의 부관참시를 당하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그 분의 통치기간 중에 행하여지던 학생들에 대한 군사훈련, 새마을 운동, 방학숙제에 등장하는 잔디씨 채취, 파리 잡아오기, 쥐잡기 운동, 저축 장려 등의 일련의 행위를 생각하면 그분의 사고에는 일본의 군국주의 문화가 뼛속까지 각인된 사람이 아니었나는 생각이 든다. 지금에서야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지 당시만 하여도 당연한 거라 생각이 들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1970년의 막바지 해에는 유신헌법을 비방을 하기만 하여도 구속을 하던 시절이었고, 동네 어른들이나 나이어린 우리들마저도 대통령을 비방하거나 정치나 정책에 대한 욕설이라도 할라치면 자라목을 내어 주위를 살펴보던 시절이었다. 그 무서운 시절에 등굣길 버스 창문을 통해서 본 중앙 성당 창가에 ‘유신헌법 철폐하라’는 플래카드를 본 순간, 어린 내 가슴은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듯 쿵쾅거렸고 곧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1979년 단풍이 막바지에 달하던 어느 날 아침 뉴스에 ‘대통령 유고’라는 낯선 단어가 뉴스를 도배하고 당일 아침 등굣길에 전주관광호텔에 붉은 별판이 달린 차들이 즐비한 것을 보고 무슨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낳나보다 생각했고 그날 하굣길에서야 대통령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평생을 대통령은 그분으로만 알았던 우리들의 70년대 학창시절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분이 부하의 총에 맞아 가시고 난 후 우리는 그분보다 훨씬 젊으며 독하게 생긴 군인 출신 대통령을 맞아 80년대를 보내야만 하였다.

 그들은 광주시민항쟁을 ‘광주사태’라는 이상한 신조어로 국민들을 현혹하였고, 광주 민주투사들을 폭도로 호도하였다. 그렇게 그 정권은 온 국민의 민주화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으며, 광주시민들의 피의 제단을 군화로 짓밟고 출범하였다. 길고도 길었던 그분의 7년간의 통치기간 내내 그 분은 자기의 선배 군인 대통령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압과 공안으로 통치를 하였다. 우리가 10대를 보냈던 70년대가 낭만이 가미된 독재였다면, 20대를 보냈던 80년대의 독재는 낭만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혹독한 강압통치였고 우리의 20대는 그렇게 암울하게 흘러갔다.

 이제 또 다시 5월이 다가왔다. 우리는 현재의 민주주의를 숨 쉬는 공기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민주주의를 만끽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살아온 70년대, 그리고 80년대가 이제는 수십 년이 흘러 비극마저도 아름답게 각색된 회상으로 변질되었으나 우리가 그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하여 약 반 백년간을 굴종하며 살아야 했고, 우리가 흘린 피와 눈물은 민주주의라는 재단에 얼마나 흘렸는지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현재의 우리 민주주의의 가치는 더더욱 소중한 것이다

 이성순<유한회사 효원 대표/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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