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술대회와 아버지
국제학술대회와 아버지
  • 박은숙 원광대 대외협력 부총장
  • 승인 2021.05.0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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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숙 원광대 대외협력 부총장

 국제학슬대회가 처음 국내에서 열렸다. 영양학 관련 학회여서 우리나라 고유 음식인 김치를 주제로한 논문을 발표하기로 했다. 외국에 머문 기간이 짧은 나에게 영어 발표는 큰 부담이어서 포스터 발표를 신청했다. 구두 발표하라는 회신이 와서 학회에서 착오를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국제학회이고 외국인에게 흥미로운 주제이니만큼 구두 발표를 요청한다는 정중한 전화까지 왔다. 세상일이 내맘대로만은 되지 않는 법이었다. 서울 부모님 댁에 머물며 학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집을 거의 비우지 않는 어머니가 그날따라 출산한 여동생 집에 가시는 날이었다. 나는 아버지 아침을 차려드릴테니 걱정말고 다녀오시라고 했다. 어머니는 음식은 다 만들어 놓겠다고 하셨다. 어릴 적부터 외지에서 학교를 다녀 집안 일을 거의 안한 내가 국제학회 발표일에 아침상을 차리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학회 첫날 일정을 마치고 저녁 늦게 부모님 댁으로 갔다. 아버지한테 인사만 하고 방에 들어가 다음 날 있을 발표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버지 혼자 심심하실 것 같아 거실로 나갔다. 아버지는 발표 준비에 방해가 될까봐 볼륨을 0으로 해놓고 TV를 보고 계셨다. “아빠! 제 발표 좀 도와주세요.” 우리 가족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렀다. 성인이 되어 아버지 앞에서 발표 연습을 하는 것은 매우 멋쩍은 일이었다. 그러나 효도하자며 용기를 냈다. 효도가 쉬운 일은 아니지 않는가. 당시 국제학술대회에서는 OHP 필름을 사용했기에 발표할 OHP 필름 한 뭉치를 아버지에게 안겨드렸다.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내가 볼 수 있도록 필름을 들고 계셨고, ‘Next please’라는 말에 필름을 넘기셨다. 첫 번째 연습을 마치고 시간을 여쭈었더니 발표 시간보다 5분을 넘겼다고 하셨다. 두 번째 연습을 시작하기 전, 아버지는 손목시계를 풀어 당신 옆에 놓으셨다. 이번에는 내용을 많이 건너뛰고 연습을 마쳤더니 너무 빨리 끝났다고 하셨다. 내일 발표할 때 시간을 조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며 한 번만 더 연습해 보자고 하셨다. 

 아버지가 대형 벽시계를 소파 맞은편 TV 아래에 내려놓으셨다. 그 시계는 숫자도, 바늘도 너무 커서 가정집에 걸기에는 과장되어 보였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그 시계가 나의 국제학회 발표 준비에 사용될 줄은 미처 몰랐다. 세 번째 발표 연습 중 아버지는 안보는듯 하면서 째깍거리는 시계 바늘로 자꾸만 눈길을 보내셨다. 대학에서 수년간 강의를 해온 터여서 아버지의 눈길이 시계의 분침 끝을 향할 때마다 나는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의 목적은 오로지 아버지에게 완벽한 발표로 보여지는 것 뿐이었다. 발표 내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슬라이드는 길게, 어떤 슬라이드는 짧게 설명하면서 발표 시간만 꼭 맞추기를 바라고 있었다. 새벽 1시경 연습을 마쳤다. 

 잠깐 잠이 든 것 같은데 문밖에서 아버지의 부드럽고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피곤해도 그만 일어나야겠다. 시간 다 됐다.” 아버지는 우리가 어릴 적부터 놀라면 안되다며 천천히 작은 목소리로 불러 깨우셨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발표도 발표지만 아버지 아침상을 차려야 했다. 그러나 반쯤 감긴 나의 눈에는 밥과 반찬, 수저가 각을 맞춘듯 놓여있는 식탁이 보였다. 앨범에서 보아온 비행기 앞에 서있는 아버지의 공군 시절이 연상되었다. 내가 아버지를 위해 처음 차린 밥상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를 위해 처음 차린 밥상이었다. 밥을 먹으며 목이 매었다. 아버지의 정성 때문에라도 나는 발표를 잘해야 했다. 국제학회장에서 발표를 마치고 집으로 출발하기 전 전화를 드렸다. “아빠! 오늘 발표 아주 잘했어요. 발표 시간도 꼭 맞췄고요, 외국 사람들이 질문도 많이 했고요, 박수도 많이 받았어요.”아버지는 허허 소리내어 웃으셨다. 세월이 흘러 나도 그 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나는 오늘도 아버지의 자녀 사랑을 흉내만 내는 중이다. 아버지는 나의 흉내에 허허 웃고 계실 것 같다. 이제는 세상에 안계셔서 더욱 그리운 분이시다.
 

박은숙 <원광대 대외협력 부총장 /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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