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의 추억과 몽상
고추장의 추억과 몽상
  • 신형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시인
  • 승인 2021.05.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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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시인

 “고향이 어디세요? 전북 순창입니다. 아! 고추장으로 유명한 그 고장 말인가요?” 제가 처음 통성명할 때마다 벌어지는 대화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명에 보통명사가 더해진 ‘순창고추장’은 이미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듯합니다. 순창군 쌍치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타지에 살면서 접하게 되는 ‘순창고추장’이라는 단어는 저를 짜릿하게 흥분시켰지요. 특히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타국에서의 유학생활 동안 고향 관련된 기억은 외롭고 쓸쓸한 고난의 세월을 헤쳐갈 수 있도록 지탱해준 필수아미노산이었으니까요.

 그 중 하나가 고추장 관련 추억입니다. 고추장담기는 가을걷이가 끝난 농한기에 시작되지요. 가마솥에 노오란 메주콩을 삶는 일부터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아궁이 속에서 넘실넘실 일렁이는 짚불의 휘황한 불꽃을 바라보는 일은 황홀 그 자체였지요. 또 솥뚜껑을 들썩이며 피슉피슉 새나오는 수증기는 고소한 몽환을 불러일으키니까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삶은 콩을 도구통에 넣고 콩콩 찧어, 도넛 모양의 고추장메주와 직육면체의 된장메주를 만드는 일은 참말로 재미난 만들기 체험이었습니다. 굴풋하여 삶은 콩을 야금야금 훔쳐 먹던 즐거움도 빠질 수 없지요.

 시렁에 매달려 찬바람 속에서 건조되던 메주들은 1월경에는 집안으로 들여와 은근히 발효되고 세척·건조과정을 거친 다음 분쇄되어 고추장으로의 변신을 기다립니다. 어머니는 설 명절 전 처마에서 고드름물이 ㄸㅗㅁ방ㄸㅗㅁ방 한가롭게 떨어지는 해맑은 날을 골라, 양지바른 마루에서 함지박에 찰밥과 조선간장과 메주가루를 고루고루 섞어 줍니다. 여기에 찰밥이 잘 삭도록 채에 받친 하얀 엿기름가루를 넣는 건 어머니의 비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안방 아랫목 이불 속에서 만 사흘 동안 발효시킨 다음, 곱게 빻아놓은 고춧가루를 소금, 조청과 함께 넣고 커다란 나무주걱으로 휘젓는 놀이는 몰래 찍어먹는 고추장의 알싸한 맛에 한겨울에 빼앗긴 아랫목을 탈환한 행복감이 보태져서 더욱 신명이 났습니다. 이후 싱거워지는 고추장의 염도를 소금을 더해 맞추며 일주일 정도 더 삭힌 맑고 새붉은 고추장은 항아리에 옮겨져 이제 장독대 한켠에서 기나긴 숙성의 잠에 빠집니다. 순창의 투명한 햇빛과 선선한 바람 그리고 어머니의 애정이 골고루 버무려져 찰진 고추장은 슬금슬금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며 웅숭깊은 감칠맛으로 농익어갑니다.

 그래요. 고향의 고추장은 은근한 기다림과 자연의 미학을 발현한 천연식품입니다. 고추장의 맛은 달달함과 매콤함의 이율배반적 결합입니다. 역설적 융복합의 미학이 구현된 순창고추장은 이제 한국인의 밥상에서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요즘 고추장은 한류에 힘입어 세계 속으로 확산돼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고추장은 세계인의 다양한 입맛에 맞는 섬세한 변화를 꾀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나 생활양식이 전통의 구심력과 변화의 원심력 사이에서 조화롭게 균형을 맞추어야 하듯, 순창고추장도 고유한 속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세대에 걸맞은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너무 전통에 얽매이다 보면 시대에 뒤떨어져 고립을 자초하고, 역으로 너무 시대를 앞서가면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기 십상입니다. 순창고추장이 고유한 항상성과 변화의 개혁성을 동시에 아우르길 기대합니다.

 저는 고추장의 영역이 확장되어가는 미래에 대해 몽상합니다. 예컨대 고추장사이다, 고추장콜라, 고추장주스, 고추장요구르트, 고추장식혜, 고추장막걸리, 고추장맥주, 고추장동동주 등을 생각해봅니다. 나아가 고추장치즈, 고추장스파게티, 고추장피자, 고추장햄버거 등을 상상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고추장의 다양한 변화와 혁신이 해외에서도 사랑받기를 희망합니다. 순창고추장의 역설적 속성이 세계인의 운명이 되는 미래를 몽상하니 사뭇 가슴이 설렙니다.

 신형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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