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바꾸어 쓸 날이 머지않았음을…
모자를 바꾸어 쓸 날이 머지않았음을…
  • 이동희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 승인 2021.05.0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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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이동희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시 한 편이 주는 사유의 나래는 넓고도 깊다. 짧을수록 미덕(?)인 시에서 한 편의 시는 인생 전체를 그려내고, 세계 전부를 담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진규의 시 한 편을 읽으며 이런 생각으로 한참 하늘을 날았고, 이런 생각으로 깊이 우물을 팔 수 있었다.

<슬픔의 중량 한 술 덜어냈다 다이어트를 좀 했다 슬픔의, 청승살이 좀 내렸다 때절은 모자보다 한결 가볍고 따뜻했다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보다 따뜻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젠 슬픔을 좀 알았다 할만 했다 겹겹이 껴입지 말 일이다 금방 내보일 수 있어야지-(정진규 시「모자를 바꾸어 쓴 날」전문)> 나는 한 편의 진술[글]이 많은 생각의 잔뿌리를 뻗는 글을 선호한다. 이 말은 앞에서 언급했던 사유의 나래가 넓고도 깊다는 뜻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원로 시인은 다른 젊은 시인의 작품을 평하며 글머리에 “나는 사연 많은 인생, 굴곡 많은 삶이 싫다”고 쓴 글을 봤다. 이런 생각은 한창 젊은 시인의 아픈 시가 안 그런 척 감추는 안간힘에 가슴 쓰려한다는 진술이 따라옴으로써, ‘싫다’는 진정성이 꽂히는 대목에서 빛이 나고 있음을 보았다.

이 시인의 어투를 내 생각과 선호도에 어울리게 패러디한다면, “나는 생각의 잔뿌리가 많은 글이 싫다”고 할 만하다. 이어지는 내 생각도 어느 대목에서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이 시로 비롯한 생각이 잔뿌리를 뻗어 내리고 있었다.

빈천지교를 나눴던 벗에 대한 생각이 사유의 잔뿌리가 줄기차게 뻗어 내리는 것을 실감한다. 내 불우했던[이라고 하면, 불우하지 않은 한 때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중학교 시절 유난히 정의감에 불타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넘치는 패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중파막이하고 여러 곳을 방황하면서 청년을 맞았고, 중년을 맞았으며, 장년의 언덕에서 ‘잊을 수 없는 친구’로 나를 찾곤 했다.

‘사연 적고 굴곡 없는 삶’을 누가 마다하고, 누가 원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이 꼭 바라지 않는 것은 잘도 찾아오고, 바라는 것은 한사코 멀어지는 것이 또한 인생길이기도 한 모양이다. 불타는 정의감 끝에 맞은 신세는 처량한 빈털터리 신세였지만, 그 이유가 가진 것을 남을 주지 못해 안달하는 천성 탓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친구를 대하는 내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연과 굴곡진 삶’이 꼭 밖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친구가 술이나 한 잔 들어가면 무거운 입을 열고 스스로 무소유가 주는 ‘외로움’을 내비칠 때마다 나는 주체할 수 없고 감당할 수는 없으나, 내가 지닌 삶의 지향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계기를 갖곤 했다. 그 친구의 ‘입말’이 아니라, 느낌으로 전해지는 ‘속말’에서 짙은 ‘외로움-슬픔’을 고유할 수 있었다.

그런 일들이 몇 번 있었던 어느 날, 그 친구의 외로움과 슬픔처럼 가난한 개척교회의 전등을 고쳐주다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슬픔의 중량’이 과연 몇 그램, 몇 근이나 나갈 것인가? 내 외로움과 슬픔이 밀려올 때마다 그 친구가 지녔을 외로움과 슬픔의 중량으로 내 외로움과 슬픔의 살이 빠져나가는 것을 실감하였다. 그런 실감이 내 천박하기만 한 세속적 삶의 비만을 다이어트 하는데 효과가 있음은 물론이다. 외롭네, 고독하네, 슬프네, 청승 떨지 않아도 내 안에 교만의 싹을 잘라 버릴 수 있다니! 그래서 ‘빈천지교貧賤之交’ 뒤에는 반드시 ‘불가망不可忘-잊을 수 없음’이 따라오지 않던가!

그러고 보면 누구나 이승의 모자를 벗고, 저승의 모자로 바꾸어 쓸 날이 오긴 오고야 마는가 보다. 이 설레는 신록의 계절에 한 편의 시가 주는 사유의 날개와 우물이 넓고 깊기만 하다.

이동희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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