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단절의 공포
소통과 단절의 공포
  • 김동근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승인 2021.04.22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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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서로에게 공감하고, 어딘가에 소속되고, 서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능력은 대개 의사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의사소통이란 인간이 다양한 정보, 의견, 사상, 감정 등을 상호간에 전달하고 해석하면서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의사소통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새로 출시되는 거의 모든 제품에 인공지능(AI)이 탑재되어 있고, 이러한 제품은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편리함에 때문에 인공지능이 탑재된 기계에 더욱 의존을 하게 된다. 편리함에 익숙해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사소통 능력을 점점 잃어 가게 된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과의 관계를 줄이거나 단절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가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완해 준다고 해도 기계가 사람을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더라도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과 관련된 것이거나 창의성을 요하는 것은 대신할 수 없다. 인간의 섬세하고 복잡 미묘한 감정을 조절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만 또 다른 걱정 때문에 쉽게 소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차단하면서 자신의 취약점을 어떻게든 감추려고 노력한다.

심리학자인 브레네 브라운(Brene Brown)은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를 ‘수치심’과 ‘취약성’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녀는 우리 인간들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단절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되는데 이것을 ‘수치심(Shame)’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수치심은 ‘공감’할 줄 모르고, ‘관계’를 맺을 줄 모르는 사람들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수치심’이 일어나는 근본 이유는 자신에 대한 ‘취약성’ 때문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나는 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지 못하는가, 나는 왜 다른 사람보다 잘 생기지 못하였는가, 나는 왜 다른 사람보다 돈이 많지 않은가 등의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취약성을 싫어하고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수치심’과 ‘취약성’은 숨겨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것을 숨기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람들과 소통할 때 몇몇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 중의 한 부류가 저 사람은 무언가를 이야기하지만 속으로 ‘저 사람의 진짜 속마음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지나치게 친절한다거나 너무 과시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의 취약성을 감추려고 하는 행동들이다.

우리가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수치심’과 ‘취약성’은 드러내는 순간 그 ‘수치심’과 ‘취약성’은 사라진다. 자신의 ‘수치심’과 ‘취약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견고한 사람이다. 이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견고한 자존감과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취약성’에 대한 가면을 쓰지 않고 떳떳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공개적으로 자신의 ‘수치심’과 ‘취약성’을 드러내어 대화하게 되면 서로 공감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 질 수 있다.

브레네 브라운은 자신의 연구결과에서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취약성’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17세기 근대 사상가 파스칼(Pascal)은 “인간의 위대함은 자기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깨닫는 점에 있다.”고 갈파하였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기적인 전략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하다가 서로 공감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해하다’를 뜻하는 영어단어 ‘Understand’를 구분해서 풀어보면 ‘밑(Under)에 서다(Stand)’라는 뜻이다. 여기에 상대방을 대입해서 풀어보면 “대화 상대방의 밑(Under)에 서야(Stand) 진정으로 그 사람을 이해(Understand)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비슷한 사자성어가 ‘역지사지(易地思之)’이다. 상대방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매일 부딪치는 대부분 갈등은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 쉽게 해소된다. 그래도 갈등이 해소되지 않으면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밑에 서서(Understand)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본다.

김동근<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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