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건과 교사 가족
세월호 사건과 교사 가족
  • 박은숙 원광대학교 대외협력 부총장/원광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 승인 2021.04.15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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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이었다. 오후 회의에 참석하려는데 동료가 고등학생들이 탄 배가 사고가 났다고 했다. 우리 대학에서도 진로진학 프로그램으로 방문하는 고교였다. 나는 입학 관련 업무를 맡고 있었다. TV 화면 속에는 기울어진 배와 배 안에 차분히 앉아 있는 학생들 모습이 보였다. 걱정이 많이 되었으나 구조가 가능하다는 인터뷰를 듣고 안심하며 회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배는 침몰하였고 300여명의 승객이 사망 또는 실종됐으며, 탑승객 대다수가 학생과 교직원이어서 안타까움은 더했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가던 여객선이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여 대형 참사가 일어난 세월호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밤잠을 설쳤다. 내가 좀더 서둘러 그 고교를 방문했더라면 만났을 학생들이었다. 신입학 업무를 맡은 나의 대책도 없는 자책이 계속되었다. 5월 4일 일요일 아침 일찍 진도로 향했다. 팽목항에는 길 양쪽에 텐트가 처져 있었고 길목 곳곳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누군가가 오면 사진을 찍을 기세였다. 카메라 앞에 대기 중인 사람들은 검정옷을 입은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의 검정옷 차림은 맞지 않았다. 수색하여 한 명이라도 더 찾으려는 상황이기에 그곳 사람들은 점퍼 차림이 대부분이었다. 팽목항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 서로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분향소는 침몰한 배 쪽을 향해 마련되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분향소에 들어갔다. 학생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기에 두 번 절하는 것이 맞는지 갈등이 되었다. 세월호에 탄 사람들을 모두 돌아오게 해 달라고 엎드려 간절히 빌었다. 그렇게 한동안 엎드려 있다가 일어서서 되돌아선 순간 나는 당황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월호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사람들은 말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문에서는 연일 학생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교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보도되고 있었다.

햇빛이 따갑게 내리쬐는 초가을이었다. 사범대 앞에서 고 고창석 선생님과 고 이해봉 선생님을 기리는 기념식수 행사가 있었다. 고 고창석 선생님과 고 이해봉 선생님은 우리 사범대학 동문이시다. 삽으로 흙을 떠서 나무에 붓는 순서가 되었다. 사회자가 유가족에게 나무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유가족 중에는 반팔 티셔츠를 입은 일곱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 어린이도 있었다. 어른들이 삽으로 흙을 떠서 나무에 부었다. 그 어린이에게는 삽을 주지 않았다. 어린이는 유심히 어른들을 바라보다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옆에 있는 어른 귀에 대고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어른은 삽을 어린이에게 건네주었다. 어린이는 삽으로 흙을 뜨려 했으나 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린이에게 삽은 너무도 크고 너무도 무거웠다. 그러자 어른은 어린이가 삽으로 흙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어린이의 순수함이 참석한 모든 사람의 가슴에 아프게 다가왔다. 그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날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할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 2018년 초가을이 되었다. 그날도 여름 끝자락이어서 날씨가 제법 더웠다. 고 이해봉 선생님 장학금 전달 간담회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마 원피스를 입은 사모님은 단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모님은 차도 마시지 않고 표정도 없으셨다. 총장님이 나에게도 말하라고 하였다. 사범대학 내 사무실 복도 맡은 편에 ‘이해봉 기념 강의실’이 있다. 사범대 역량진단 준비로 주말에도 출근하는 날이 많은 즈음이었다. 특히 주말에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갈 때면 나는 이해봉 선생님 사진을 한동안씩 바라보곤 했다. 이해봉 선생님은 맑은 피부의 동안이었다. 그렇게 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목숨을 바쳐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 가족을 두고 생사를 달리할 때의 마음이 전해오듯 가슴이 아려왔다. “사진 속 이해봉 선생님과 많이 닮으셨어요.”라고 했다. 사모님 눈에서는 소리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분이 우리 앞에서라도 실컷 울기를 바랐다. 그렇잖아도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젊은 부부가 함께 다니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 자리에 참석한 모두는 더욱 숙연해졌다.

고 이해봉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느냐고 물었더니, 학생들과 여행 잘 다녀왔다면서 방금이라도 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올 것만 같아서 차마 그런 자리에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오늘은 큰맘 먹고 간담회에 참석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고 고창석 선생님 추모비 제막식에도 유가족은 참석하지 않았던 것 같다. 최후까지 학생을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들은 바닷물 속으로 쓸려가 시신도 찾지 못한 상태였으니 유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올 것 같은 희망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고 고창석 선생님과 고 이해봉 선생님 유가족은 거액의 장학금을 후학 양성을 위해 기부하셨다. 두 선생님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사범대학 예비교사들은 지와 덕을 겸비하고 도의를 실천하기 위해 오늘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고 고창석 선생님과 고 이해봉 선생님을 비롯한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유가족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한다. 그 어린이도 아픔을 딛고 잘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은숙<원광대학교 대외협력 부총장/원광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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