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전북여성문인] 목경희(1927~2015) 수필가(상) 새벽 어스름을 뚫는 발자국 소리
[내가 사랑한 전북여성문인] 목경희(1927~2015) 수필가(상) 새벽 어스름을 뚫는 발자국 소리
  • 김용옥 시인, 수필가, 국제펜한국위원회 이사
  • 승인 2021.04.14 16: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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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내 최대 문학단체인 전북문인협회에서 최초로 여성 회장이 취임하게 된 것이 뉴스가 되는 세상이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아직 변한게 없다. 전북문단사에서 여성문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 그 이름은 양념처럼 쓰였을 뿐, 날것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잡는 일이 쉽지 않았다. 전북여성문인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록에 남겨야한다. 본보는 김용옥 작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여성문인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내기로 했다. 함께 그리워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마련해 여성문인의 진가를 재발견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어둑새벽에 깨어난 날에는 목경희 선생을 문득 생각한다. 사목사목 교회에 걸어가 새벽기도를 드리는 일이 일과의 시작이요 건강의 돌보미라고 하신 분이다. 평소에 그분은 하나님, 주님을 남발하지 않으셨다. 만남의 자리에선 어떻게 늙어가야 잘 늙는 일인가를 표본처럼 보여주셨다. 고전의 싯귀절들, 곡조 몇 가락, 문사의 품격으로 대화하셨다. 멋진 선배 수필가였다.

  목경희 선생은 어휘력이 탁월하여 말이 빠르듯이 글줄이 빨리 흘렀다. 목 선생은 원숙한 인격과 세파의 예리한 분별력으로 수필을 썼다. 팔순을 넘기자 평생 쌓은 장서와 직업이 되어준 재봉틀과 소장품을 모교인 ‘전주여고(전신 전북고녀 16회 졸업생임)’에 기증하고 참으로 홀가분해하셨다. 전북의 명문 전주여고 출신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귀히 여겨야 할 문학책들이지만 21세기가 되어 수시로 날아드는 시집, 수필집을 읽을 새도 없이 다발을 지어 묶으시더니 일괄 기증했다. 당신의 자랑인 전북고녀에 당신의 반생을 안치한 셈이다. 선생의 작은 아파트는 훌렁하게 비워지고 대신 화분들이 줄줄이 가족인 양 들어앉기 시작했다. 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며 참말로 꽃을 사랑하셨다.

  어느 봄날. 우리 집에 오셔서 풍성한 관음소심란을 분총해 달라셨다. 화분을 사다가 서슴없이 건강한 몇 촉을 갈라 앉혔다. 그리고 달포나 지났을까. 그 화분에서 꽃대가 쑤욱 돋아났다.

  “선생님, 댁에 계시는군요. 지금 택시 타고 갈게요.”

  저 꽃이나 보고 드릴까, 엉뚱한 욕심보가 풀어지려는 걸 잘라내는 일이었다. 선생께선 “어마나!”를 연발하셨다. 잘했다. 그렇게 적어도 2주일에 한 번씩 갖가지 데이트를 했다. 김갑순 수필가가 양념처럼 끼어 다정했건만, 먼저 훌쩍 떠나시자, 선생은 점점 어린 소녀처럼 변해갔다. ‘나이가 무서운 것을’ 보여주신 거다.

故 목경희 수필가(좌)와 김용옥 시인의 행복했던 한때
故 목경희 수필가(좌)와 김용옥 시인의 행복했던 한때

  1970년대에 처음 뵙고, 노년에 든 20여 년간 모녀처럼 손잡고 잘 지냈다. 더구나 내 어머니 돌아가신 후엔 섬겨드릴 만한 유일한 노인이었다. 2010년대 초. 선생은 큰자부를 암벽추락사고로 잃고 애통해하셨다. 물론 홀로 남은 큰아들 걱정에 몸이 말라갈 지경이었다. 그 눈물의 기도를 누가 알랴. “샘, 치문(당시 재단법인 한국기원 부총재) 씨는 할 일도 뚜렷하고 건강해요. 애들 다 성장했고요.” 선생은 가끔 엉뚱해지기 시작했다.

  그전보다 자주, 손을 잡고 전주시내를 오락가락했다. 옛 기억을 찾아 여기저기 가보기를 수시로 원하셨다. 그럴 동안에 <전북문단>에서나 <전북수필>에서 ‘원로문인 초대석’ 한번 기획한 적이 없다. 문단이 어지럽고 뿌리조차 없이 꽂힌 묘목밭 같았다.

  “난, 부자 되었어. 치문네서 외환 잔돈을 몽땅 얻어와서 환전했거든!” 세뱃돈 받은 어린이처럼 신나셨다. 그러시곤 보라색 줄무늬가 선명한 여름용 티셔츠를 기어이, 선물해주셨다. 당신이 디자인하고 재봉질하여 블라우스 한 벌 꿰매어주고 싶은데 이미 어찌할 수가 없다며. 노인 수필가의 용돈으로 얻은 선물. 오직 주고 싶어서 주신 선물. 올이 튕겼으나 아직도 입는다.

  목경희 선생은 막 이순 이후 기둥 같은 외딸을 천국으로 앞세웠다. 그 후 부지런한 수필가가 되었다. 또 참으로 정직 정확한 작가다. 글 속에 꽃이름 하나를 읽을 때면, 그분의 열정과 글에 대한 태도가 떠오른다. 검정 수첩 갈피에 끼워진 꽃과 잎사귀들. 만남의 자리에 앉자마자 펼치는 수첩에는, 고향땅에 다녀오다 채집한 광대나물, 꽃마리, 개구리발톱, 고추나무꽃, 국수나무꽃이 마른 채다. 꽃이름을 불러드리면 수첩에 빼곡히 받아적었다. 쪼그리고 앉아 풀꽃에 눈을 맞추고 있는 늙은 어린이가 그립다. 봄 봄 꽃봄이 열리니 선생이 더욱 생각난다. 선생 생존하실 적에 <<우리 풀꽃 77>>을 드리지 못해 못내 서운하다.

  목경상(본명) 선생은 ‘꽃기생’이라고 했다. 서울에 사실 적에 어쩌다 내려오시면 최승범 선생을 둘러서 최진성, 한재현, 김상태 선생과 김옥생 선생 내외분, 어쩌다 김순영, 김숙 선생이 동석했다. 회갑기념으로 출판한 첫 수필집 <<먹을 갈면서>>를 들고 ‘한성식당’에 모인 날에 선생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삶에는 희비쌍곡선이 겹쳐 들기 마련인데, ‘딸의 암 투병’ 때문이었다. 그날 선생은 “아아~으악새 슬피 우오니 가을인가 봐~~”를 그야말로 ‘꾀꼬리 같은’ 목청으로 슬프게 불렀고, 우리는 더듬거리듯 합창을 했다. 기쁘나 슬프나 그 어른들의 18번애창곡이었다.

  노년에는 전주 변두리 음식점으로 가끔 모시곤 했다. 어김없이 수첩을 꺼내어 보며 ‘숨어 우는 바람소리’를 싱그러이 부르실 땐 박수를 쳤다. 대학가요제의 수상작 노래를 어디서 배우셨냐는 물음에 “가사가 너무 좋아서 젊은 집사한테 몇 번 불러보라 했지.” 팔순노인의 열의가 이만큼이었다. 삶의 멋을 아는 수필가였다.

 

김용옥 시인
김용옥 시인

 글 = 김용옥(시인, 수필가, 국제펜한국위원회 이사)

  

 ※김용옥 수필 ‘내가 사랑한 전북여성문인’은 격주 목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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