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화된 감정들이 문학으로 재탄생할 때
파편화된 감정들이 문학으로 재탄생할 때
  •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1.04.1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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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가족”이라는 존재가 나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얼룩이다. 나의 삶을 교란하는 얼룩이다. 가족은 어떠한 환경에서든 가장 예쁜 모습으로 계속해서 내 곁을 붙어다닌다. 그 아름다움에는 파편화된 슬픈 감정들이 문학으로 재탄생한다. 그렇게 미래의 나를 끌고 갈 가족이 하루의 무늬를 그렸다가 지운다. 힘든 그림은 괄호 안에 넣기도 한다.

화장대 서랍에 숨겨둔 말도 밥 떠먹는 얼굴을 쳐다보다가 잊어버리는 은총으로 산다. 시간마다 균열과 찢어지는 형상이 아름답게 원고지를 메운다. 무거운 마음이 날개를 달고 먼지처럼 떠다닌다. 베란다 유리창에 서리가 낀 날은 손가락으로 식구들의 이름을 빽빽하게 쓴다. 손이 시리도록 썼다가 지운다. 서리는 공기 중의 수증기가 낮은 기온에 응결된 것이지만, 그 응결된 하얀 표면에 결국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가족의 얼굴이 건너편 깊은 아파트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우리 생활 전반을 변화시키고 있다. 전염병의 창궐이라는 예외 상황에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문학과 접목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함으로써 언택트를 일상화하는 문화를 앞당기고 있다.

사람은 맞대면하지 않지만, 문학을 통해 대면하는 비대면 문학은 사막을 걸어가는 것 같은 삭막한 환경에 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모든 게 낯설고 서툴고 두렵다.

마음은 메말라 있어 살기 힘든 국민을 망치로 뒤통수를 때리는 정치인들의 황당한 말은 내가 사는 땅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하고 머리를 흔들어 본다. 자신이 소유한 아파트 전세금을 지난해 5월 23.3% 올린 모 정치인의 뻔뻔스러운 응답에 더 놀랐다. “낮게 받으면 다른 임대하는 이웃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지 않냐”라고 하는 말. 그들은 거짓말과 막말로 불쏘시개 같은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혼란스럽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든지 성을 낼 수 있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른 정도로, 올바른 목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성을 내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쉬운 일도 아니다.”를 떠올리며 분노를 억지로 달래보았다.

나를 위로해주는 시가 있어 기쁨을 재생산해 본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흰옷만 고집한 채 자신의 방에서 칩거하며 은둔생활을 했던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만약 내가>라는 짧은 시를 맛보다가 마치 화자로 불러들이는 것 같은 시에 접해보면서 깨진 유리 조각으로 책장을 넘겼다. 나의 삶을 닮은 언어들이 감정을 다독이는 시였다.

가는 귀먹어 목소리 큰/ 귀먹짜가리 이생원/ 지난 봄부터 굵은 귀먹어/ 목소리가 더 커졌다

정양, <더 큰 소리로>의 일부

“좋은 시는 무엇을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좋은 시는 몇 개의 단어로 감성을 깨우고 삶에 영감을 불어넣는다.”라고 태국의 승려 아잔 브라흐마 스님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좋은 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움직인다. 아픈 영혼을 위로해주는 언어들을 시 속에서 만날 때 우리의 살벌한 심장과 파편화된 감정을 다스려 준다.

며칠 전 등기 우편물이 왔다. 큰 봉투의 발신인은 내가 일 년에 한두 번 회의 시에 뵙던 한방병원 원장님이다. 회의 때 눈인사만 나눌 정도인 선생님이 시집을 보내시다니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웬일일까? 뭘까? 봉투를 뜯어보고 와르르 기쁨이 오후의 햇살을 업고 쏟아졌다.

시집 세 권과 시집을 둘러싼 신문 기사와 친필 편지였다. 진료실에서 쓰셨다는 원장님은 시집을 꼭 나에게 보내고 싶었다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국졸의 아버지, 운전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부지런히 재미있게 시 쓰는 P 시인의 모습이 참으로 좋습니다.”라는 짧은 글에서 파편화된 감정들이 곱디고운 수채화처럼 무지갯빛으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시가 좋아서 추천한다기보다는 시인이 좋아서 발송한다는 이유였다. 그렇다. 좋은 시는 좋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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