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사람은 전주를 모른다
전주 사람은 전주를 모른다
  •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 승인 2021.03.1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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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이문원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하신 선생 집안은 유례를 찾기 힘든 명문가다. 수당 이남규 선생부터 부친인 평주 이승복 선생을 포함 4대가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평소에도 부족한 나를 아껴주시던 선생께서 내가 고향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주신 것이다. 한 시간이 넘는 통화에서 귀한 말씀과 각별한 당부를 전하셨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말씀이 있다.

“장 선생이 예산군에 와서 우리 군의 역사를 참으로 잘 정리해줬습니다. 내가 퇴계 종손도 만나 얘길 나누었지만 안동 사람은 안동을 잘 모릅니다. 전라도 역사를 충청도 사람이 쓴 것도 그래섭니다. 예산군 역사는 장 선생께 부탁합니다.” 내게 참으로 과분한 말씀이다. 한 편으로는 8년 3개월의 시간이 내 삶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구나라는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것은 나 개인만이 아닌 고향의 명예와도 관련된 시간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2012년 9월 5일자로 예산군에 전입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직장 선배 한 분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장상록씨가 전라도에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예산군청 거의 전 직원이 색안경을 끼고 봤습니다.” 충분히 예견했던 일이지만 선배의 입을 통해 확인하게 되니 뒷골이 서늘했다.

전라도에 대한 편견을 전국 거의 모든 곳에서 경험했지만 실제 사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자칫 내가 잘못하면 고향 전체에 누를 끼치겠구나.’ 조심, 조심 그리고 또 조심했던 시간이었다.

학연, 지연, 혈연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은 외롭지만 반대급부로 익명의 자유로움을 준다. 하지만, 내겐 그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모르지만 나를 지켜보는 눈은 어디에나 있기에.

그것은 나를 의도하지 않은 신독(愼獨)의 세계로 안내했는지 모른다.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고향 금구를 제외한 김제 읍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예산군 12개 읍면은 구석구석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때로는 토양검정을 위한 시료채취를 위해 전 읍면의 논과 밭을 다녔고 매월 발행하는 예산군소식지에 실을 원고 작성을 위해 역사적 현장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보석 같은 예산 분들을 만나는 영광도 얻었다.

나는 친한 예산 지인들과 술자리에서 간혹 이런 말씀을 드렸다.

“충청도 양반 고장 예산군에 와서 전라도 양반의 모습은 어떤지 보여드리려 합니다. 외람되지만 추사 선생님께서 제주도 유배 길에 가시고 오실 때 모두 제 직계 5대조인 해초공 댁을 들려가셨습니다.” 그것은 나는 물론 내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숲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숲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것을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숲 밖에서 찾아 온 손님이다. 그 어떤 찬란한 문명도 고립되어 존재하는 순간 쇠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자신을 객관화할 수 없는데서 오는 오만과 편견 때문이다.

전주와 전라북도 사람은 과연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객관화하고 있을까.

안동 사람이 안동을 모르듯 전주 사람은 전주를 모른다. 우리가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예산군민이 나로 인해 완주와 전북에 대해 작은 호감이라도 생겼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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