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기억을 복기하는 법
서로 다른 기억을 복기하는 법
  •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 승인 2021.02.2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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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한국 문화계 최초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한 소녀의 성장 소설쯤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요코는 함경도 나남에 살고 있던 11세 소녀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한 이 소설은 패전 후 조선 거주 일본인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책은 일본의 조선 강점과 전쟁을 비판하고 오빠를 도와준 한국인 김씨 가족 얘기도 담고 있다.

문제는 한국인에 의한 일본인 학살과 강간 장면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그 글을 본 미국인에게 한국인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고 만다.

독일인이 기억하는 2차 세계대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가해자라서 감춰져있지만 그들 역시 끔찍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과 영국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은 현재 기준이라면 전범으로 기소될 만한 일이다. 특히 소련 지도부는 독일인에 대한 약탈과 강간을 거의 공개적으로 방조 묵인했다. 독일 여성 150만 명이 성폭행을 당하고 5만 명이 자살했다.

그 중엔 2001년 자살한 하넬로레 콜(Hannelore Kohl)도 있다. 독일 통일을 완성한 헬무트 콜 전 총리의 부인이다. 당시 12세 소녀 옆엔 엄마도 있었지만 모녀의 운명은 가혹했다.

사회적 기억은 권력에 의해 가공된다. 이스라엘 정부가 특정 작전에 앞서 군인들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방문을 금지했던 것은 이스라엘군이 나치와 동일화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일부에서 일제 청산과 비교해 역사 청산을 잘했다고 얘기하는 프랑스가 과거에 대해 기억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인이 유태인 검거에 얼마나 자발적이고 협조적이었는지에 대해 이미 1960년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증언했지만 프랑스는 그 사실을 오랜 시간 애써 외면했다. 기억의 사회적 국가적 가공은 도덕적 평가와는 별개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후 상당기간 독일인에게 가장 끔찍한 전쟁으로 기억된 것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진행된 30년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종전 후 300년이 더 지나서까지 독일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던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무리 된다. 국민국가와 주권 개념을 창조한 그 조약은 기억의 국가적 제약을 공식화 한다. 이제 기억의 단위로 개인을 넘어 국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때로 개인의 악을 국가가 합리화 시켜주는 근거가 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문록(文祿)과 경장(慶長)의 역(役) 그리고 항왜원조(抗倭援朝)는 하나의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이 세 나라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서로 다른 기억이 불가피하다면 공존하는 대상들 사이에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미움과 보복, 그리고 그 종국에 폭발하는 전쟁의 악순환은 서로 다른 기억에 대한 의도적 무시와 외면에서 근원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이 좋은 이웃으로 현재와 미래를 함께 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기억을 복기하는 법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통일 역시 가장 큰 전제는 남과 북의 서로 다른 기억에 대한 합의다.

내 기억의 적잖은 부분이 타인의 그것과 다를 때 스스로 되돌아봐야 할 이유도 다르지 않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타인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살필 순간이다.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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