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벌적 손해배상
징벌적 손해배상
  • 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 승인 2021.02.1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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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님, 벌금 말고 집행유예 안 될까요?” 형편이 어려운 의뢰인의 부탁이다. 법적으로 보면 비상식적인 요청이다. 형사법상 형의 집행을 유예하는 벌이 벌금보다 높다. 판사에게 의뢰인이 사정이 어려우니 벌금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해 달라고 이상한 요청을 해야 한다. 돌려서 말하거나 그냥 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해달라고 변론하면 되지만, 한편으론 씁쓸하다. 집행유예 기간 동안 범죄를 저지르면 집행유예가 취소되는 등 여러 불이익이 뒤따름에도 굳이 원하는 의뢰인의 사정이 딱해서다. 물론 벌은 받아야 하지만.

“이것 밖에 못받나요?” 이혼상담과정에서 대략적인 위자료 액수를 듣고 난 의뢰인의 반응이다. 남편의 가정폭력, 외도, 도박에 수년 혹은 심지어 수십 년간 시달렸음에도 우리 법원이 인정하는 위자료 액수는 1천만 원에서 많게는 5천만 원 정도다. 그동안 받은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수억을 받아도 모자라겠으나, 우리 법원은 손해배상 사건의 손해액 인정에 인색한 편이다. 특히 위자료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손해에 관하여는 더욱 그러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국가가 이른바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의 누명을 쓰고 10여년간 복역한 최모씨에게 16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했다. 최모씨는 16세였던 2000년 당시 구속 기소되어 징역 10년 형을 받고 만기 출소했다. 분명히 16억 원은 거액이지만, 꽃다운 청춘의 10대와 20대의 절반을 교도소에서 보낸 최모씨의 억울한 사정을 생각하면 많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정치권과 법조계에서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이 전면적인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고 있지 않지만,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이나 정보통신망법 등 개별 법률에서 일부 도입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찬성하는 입장에선 현재 우리 손해배상 제도는 다양한 침해유형이 증가하는 현대의 배상제도에 매우 미흡하며 거대 기업을 상대로 약자인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고 거액의 손해배상 책임은 불법행위의 예방적 효과(이른바 법준수 기능 Law Enforcement)를 가져온다는 논거를 든다. ‘가습기 사건’과 같이 거대 기업이 소비자의 생명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을 때 임원 몇 명을 교도소로 보내기보다, 기업에 막대한 손해 배상금을 물려 다시는 불법행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기업의 경영활동을 위축시키거나 소송의 남발을 가져와 소송경제에 심대한 악영향을 준다는 논거를 든다. 소송의 천국인 미국에서는 공산품에 이상한 경고문이 붙어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컨대 땅콩 봉지에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먹지 마세요’라고 경고문이 붙어 있는 것처럼, 제품에 지극히 당연한 주의사항도 빼곡히 적혀 있다.

개인적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은 말 그대로 ‘징벌적’ 성격이 있으므로, 가해자의 비난가능성이 높은 고의나 과실에 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또한 국가나 대기업을 상대로 하는 손해배상 소송의 국면에서 많이 활용될 것으로 보이므로 증명책임의 합리적인 완화도 고려해 볼만 하다. 한편 법관중심의 현재 재판과정보다 형사재판에 국한되어 있는 배심제를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에도 적극 도입해보는 것도 참여민주주의에 부합할 것이다.

나영주<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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