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독립운동가 - 권쾌복, 배학보, 유흥수 선생
2월의 독립운동가 - 권쾌복, 배학보, 유흥수 선생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1.02.0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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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청년들, 민족차별과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다

1939년 학생 노동력 강제동원과 일본·조선학생 사이 마찰을 차별적으로 처리하여 벌어진 사건(왜관사건)으로 인해 대구사범학교 조선인 학생들은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1940년 11월 23일 유흥수 선생은 독서회 참가자들과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독립할 것을 목표로 하는 비밀결사를 합의하고, 이름을 ‘문예부’라고 결정하였다. 문예부는 ‘학생’ 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하였다.

1941년 2월 중순 유흥수 선생은 권쾌복 선생과 배학보 선생 등을 만나 역량을 결집할 통합된 비밀결사를 제안했다. 통합된 조직은 ‘다혁당’으로 결정하였는데, ‘다’는 영웅은 갈색 또는 흙색인 다색(茶色)을 좋아한다는 뜻에서 ‘혁’은 혁명을 의미하였다. 다혁당은 조직 체계에서 당수와 부당수를 두고, 총무, 문예, 예술, 운동부 등 4개 부서를 두고 기존의 활동을 계승하였다. 특히 문예부 산하에 문예창작부와 연구부를 두었는데, 이전의 ‘문예부’와 ‘연구회’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권쾌복 선생은 당수를 맡았으며, 배학보 선생은 부당수를 맡고, 유흥수 선생은 문예부 산하 문예창작부 책임을 맡았다.

이렇게 통합되어 활발한 활동을 준비하였으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활동하던 정현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내용이 발각되어 수사 중 다혁당 활동이 드러나 다혁당은 결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후 대규모 검거 열풍이 불어 1941년 12월에 35명이 예심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것은 이 시기 비밀결사 사건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다혁당 사건은 지식인들이 변절하고 항일운동이 침체 된 시기에 벌어진 운동이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고 꿋꿋하게 항일운동을 유지했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운동을 통하여 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다.

정부에서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권쾌복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배학보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유흥수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전북동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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