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의거
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의거
  • 고재흠
  • 승인 2019.03.14 1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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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1일 경남 마산시(현재의 창원시)앞바다에서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체로 발견됐다. 그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김주열 군은 마산에서 시작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 전북 남원 출신이었던 김주열 군은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1960년 3월 14일 마산으로 들어갔다 변을 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16세. 경찰은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 군의 주검을 바다에 버렸다. 김주열 군의 주검은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로 인해 ‘좌익 폭도’로 내몰린 시민들의 분노를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12년 동안 지속된 장기집권 체제의 연장을 위해 부정선거를 꾸몄다. 선거는 ‘투표함 바꿔치기’, ‘5인 1조 투표’ 등 갖가지 불법적인 수법들로 치러졌다. 선거 결과는 당연히 이승만이 속한 자유당의 압도적 승리였다. 부통령인 자유당 이기붕의 득표율이 115%가 나오자 적당히 낮춰 발표하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급기야 국민들은 분노했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는 중년 여성들과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에게까지 확대됐다. 고려대 학생 3000여명은 1960년 4월 18일 “마산 사건의 책임자를 즉각 처단하라.”는 선언문을 낭독 후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대학생들의 시위참여를 이끌어냈다. 전국 27개 대학 교수단도 서울 종로에서 시위를 했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국선언문을 채택했다. 시위는 4월 19일 정점을 치닫게 된다.

이승만 독재는 카빈총과 장갑차를 동원해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 발포했다. 이로 인해 수백 명이 사망했으며, 총상자 또한 수백 명에 달했다. 당황한 이승만은 서울지역 일대에 긴급 계엄령을 선포한다. 하지만 계엄군은 경찰과는 달리 중립을 지켰다.

이처럼 전국적인 시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사임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국민들을 비난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면서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계엄군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았다. 심지어 계엄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서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한미국대사는 학생 시위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고, 미국 국무부도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국민의 불안과 폭력행위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항의 각서를 보낸다. 더 이상 정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당시 김정렬 국방부 장관은 이승만에게 하야할 것을 권유했다. 이승만은 국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듯 했다가 다시 거부했다. 그러나 한 국무위원의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그의 사임서는 국회에 제출됐고, 권력을 놓기 싫어하는 늙은 독재자의 최후 몸부림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굴복했다.

이로써 부정선거를 저지른 이승만은 하야하고 하와이로 도주한다. 3·15 부정선거는 한국 헌정사 이래 국회 의결을 통해 정식으로 무효 처리된 유일한 선거로 남았고, 4·19 혁명은 독재에 항거한 국민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린 최초의 혁명으로 기록됐다.

전 세계적으로 정치지도자가 독재를 하면 반드시 패망한다는 교훈을 주는 사례는 많다. 고대 로마제국의 네로황제나 중국의 진시황제의 사례를 제외하고도 이 지구촌에서는 자신의 절대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온갖 폭압정치를 행해왔던 독재자들은 많다. 가깝게는 한국의 이승만, 박정희가 그렇고,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을 비롯해서 루마니아 대통령 ‘차우세스쿠’, 중동의 리비아의 ‘카다피’, 유고슬라비아의 ‘밀로세비치’, 남미의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 이집트를 30년간 통치하였던 ‘무바라크’, 우간다의 ‘이디 아민’,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 아이티의 ‘장 클로드 뒤발리에’ 등이 최후를 맞았다.

최초 마산에서 일어난 3.15 의거는 단지 마산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국에 있는 모든 국민의 염원이 마산에서 집약돼 곪은 부분이 터진 것이다. 마산 사건은 현대사의 다른 많은 사건과 오버랩된다. 1979년의 부마항쟁과 1980년의 광주항쟁, 또다시 중·고등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2008년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 마산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고재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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