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한말 호남의병사 이규홍
〔기획취재〕한말 호남의병사 이규홍
  • -익산의병기념사업회 이용희 회장
  • 승인 2011.11.0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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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이규홍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군은 1907년 정미년 11월 15일 현재의 완주군 화산면 화월리 가경재에서 첫 번째 전투를 치렀다. 무기가 모자라 이 지역에 병기 제작소까지 만들어 놓고 싸운 전투에서 일본군 29명을 사살하고 21명의 아군이 전사했다. 12월 5일부터는 주둔지를 진안, 장수, 용담 등지의 산간으로 옮겨가면서 싸워 일본군 44명을 사살하고, 아군도 7명이 전사했다. 이듬해 정월 초하루부터 초사흘까지 진산, 금산 등지를 행군하며 또다시 접전을 펼쳐 일본군 56명을 죽이고 아군 57명이 전사했다. 연이은 전투로 129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대단한 전과를 올린 것이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의병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얻은 전과이기에 더욱 빛나는 성과였다. 하지만, 유격전을 펼쳐야하는 소규모 단위의 의병부대로서는 85명이란 아군의 살상은 치명적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구국의 일념으로 일어났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한말 의병장 오하(梧下) 이규홍(李圭弘)은 1881년 현재의 익산시 팔봉동 석암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애국심은 부친 이기영의 영향이 지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기영은 중추원 이관으로 있으면서 후일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인물들과 깊은 교우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의 정세에도 밝았고, 나라의 미래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적으로는 충의와 효자로 널리 알려져 유림들의 추천으로 성균관에서 표창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이런 가문에서 어릴 적부터 충과 효를 익히며 성장한 이규홍은 총명한 재질에 학문까지 탁월함을 보여 20세인 1900년에는 부친처럼 중추원 의관직에 올랐다. 기골이 장대해 위풍이 당당했으며, 성품이 강직해 의리에는 굽히지 않았으면서도 정의에 넘쳐 사람을 포용하는 너그러운 아량을 겸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규홍은 1906년 최익현과 임병찬의 병오창의에 참여의 뜻을 밝혔으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각처에서 의병들이 봉기할 때 병기와 군사를 모집하며 스스로 의병의 길로 나아갔다. 이때 그의 부친 이기영은 가산을 팔아 군자금을 대는 등 거사에 적극 협력했다. 그해 11월 6일, 27세의 청년 이규홍이 아침 일찍 부친에게 출진을 고하자, 조금도 서운한 표정을 짓지 않고 “부디 몸을 던져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라”며 엄숙한 훈계를 내렸다.

이후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 129명을 사살하는 등 지역에서 가장 왕성한 활약을 보였지만, 의병들의 고전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일본의 정보망을 피해 엄동설한에 준령험로에 풍찬노숙을 밥먹듯하며 악전고투했다. 잠시라도 더운 방에서 편한 잠자리를 취하고 마음 놓고 더운 식사를 하지 못하며, 길을 가도 평탄한 길을 갈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지들 가운데 계속 전사자를 낸다는 것은 전체의 사기와 전투력을 상실하는 것이었다.

1908년 2월초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 토벌대가 각 군면의 의병 가족을 잡아들이거나 혹은 포살까지 한다는 소식이 유포되고, 의병으로서 관에 자수 귀환하는 자는 죄를 사면한다는 방이 방방곡곡에 붙게 되니 마음이 날로 흔들리고, 전의가 크게 약화됐다. 설상가상으로 3월에는 호남의병장 고광순, 기삼연, 기봉준 등이 전사했고, 이석용과 문태서 등의 체포소식이 들려오자 이규홍도 단독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 4월 20일 의병을 해산하기에 이른다.

이규홍은 계속적으로 지하운동을 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고, 순종황제의 밀칙을 받은 임병찬이 1914년 3월 대한독립군 의군부 창립계획을 수립하자 이에 동참하지만, 일제에 발각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1918년 5월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이동녕, 이광수, 안창호, 신익희 등의 인사와 접촉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1919년 2월 독립청원서를 지니고 파리로 떠나는 김규식에게 1천300원을 여비로 내고, 이듬해인 1920년에는 간도에 설치된 사관학교 연성소에서 김좌진 장군을 만나 군자금으로 3천원을 헌납하기도 한다.

1921년 3.1운동 이후의 국내정세를 살피고, 군자금도 조달하기 위해 이규홍은 그해 6월 몰래 국내에 잠입했다. 그는 걸인이나 보부상 행세까지 하면서 4년 동안 암약했지만, 1924년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4개월간의 무자비한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자, 일본은 의병창의가 18년이나 지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를 붙여 병보석으로 석방했다. 고문으로 오른쪽 어깨가 부서졌고 몸은 형독으로 회복할 수 없는 처참한 상태였다. 그렇게 이규홍이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집을 떠날 때 태중에 있던 아이는 18세가 되고, 부모는 모두 작고한 뒤였다. 이규홍도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29년 6월 6일 관동자택에서 한 맺힌 삶을 마감한다. 그사이 이천여 석에 달하던 집안의 재산은 풍비박산나고 집마저 빚으로 넘어가 오두막집으로 이사하고, 집안이 전부 몰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익산시 팔봉에서 금마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편 길가에 이규홍 의병장 묘역이 정비돼 있다. 눈에 잘 띄는 큰길가에 있지만, 아무런 표식이 없어 관심을 두지 않으면 지나쳐버리기 십상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도 위치가 나오지 않는다. 물어물어 갈 수밖에 없다. 의병활동으로 가족과 집안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지만 아들을 후원한 부친 이기영의 묘소도 지인이 아니라면 찾을 수 없다. 더욱 안타까운 건,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남아 있던 이규홍의 생가가 무관심 속에 얼마 전 헐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져보는 건, 지난해에 이규홍 의병창의 103주년 기념포럼이 처음으로 개최됐고, 올 들어 지난 5월에는 기념사업회까지 창립되면서 미약하나마 그를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멸문지화를 감수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규홍 의병장을 위한 기년사업회가 이제야 출범했다는 것은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인터뷰> 이규홍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용회 회장 인터뷰

“언젠가 한국독립운동사를 쓴 대학교수를 만났는데, 전북에서 의병사 연구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합디다. 한말 의병운동으로 5천600여명이 죽었는데, 그 중 1천300여명이 호남에서 죽었어요. 그렇게 나라가 어려울 때 과감히 목숨을 바친 지역에서 왜 아무도 연구를 하지 않느냐고 질책을 하는 거예요. 부끄러웠어요.”

익산의병(이규홍의병장)기념사업회 이용희 회장이 의병기념사업에 뛰어든 사연이다.

“익산 사람들이 이규홍 의병장이 얼마나 큰 인물인지를 잘 몰라요. 1908년 의병을 해체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려는데, 현상금이 붙은 거예요. 자그만치 4천원씩이나. 그 돈이면 당시에 황소 천마리를 살 수 있었어요. 일본 놈들이 이규홍 의병장을 그렇게나 큰 인물로 봤냐하는 거예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지난 2009년 발행한 ‘한말 후기의병’을 보면, 의병장 이규홍의 의병활동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구는 필요한데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익산에 사는 누군가는 나서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해 기념포럼을 열었고, 올해 기념사업회도 발족시켰다. 그리고 매년 11월17일에는 순국의병 전생을 추모하는 기념식을 거행키로 했다.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만 있지 서두르는 사람이 없어요. 이름도 빛도 없이 순국하신 85명 익산의병의 애국 희생정신을 계승하려면 하루속히 기념공원과 기념사업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책임이며, 선열에 대한 도리입니다.”

-익산의병기념사업회 이용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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