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전북의 항일의병사4><기고>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임실
<한말 전북의 항일의병사4><기고>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임실
  • -최성미 임실문화원장
  • 승인 2011.10.2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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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이석용은 17세인 1894년 부령 김씨에 장가들었다. 그해 동학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를 틈타 일제침략이 시작되고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이석용은 당대의 석학들을 두루 찾으며 구국의 방책을 묻는다.

28세가 되던 1905년 마침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많은 우국지사들이 서울에 모여 조약 철폐를 주장했으나 무력으로 진압된다. 이석용도 이때 상경해 미국공사에게 서한을 보내고 일제침략을 통렬히 규탄했지만,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일으켜 세울 대책이 없었다.

이에 의병을 계획하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던 1907년 8월 한국군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전쟁이 벌어지자, 이석용은 마침내 아버지께 하직 인사를 올린 뒤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집을 떠났다.

이석용은 전기홍 의병장과 더불어 호남 의병의 두 거성이다. 임진왜란 때나 한말 일제 침략기에는 필히 호남의 자력과 인력 없이는 국난을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고 하니 호남 의병의 활약상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연원이요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석용은 29세란 젊은 나이에 의병장이 되고 수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일제의 토벌작전에 못 이겨 일단 의병을 해산했으나, 이 후 다시는 의병을 규합하지 못했다.

그러다 임자년(1912) 겨울 비밀결사대인 임자동밀맹단을 결성해 광복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잡혀 투옥됐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때 나이 겨우 36세였다.

지금도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가 배향된 소충사에서는 해마다 군민의 날에 그들의 정신을 추모하는 제례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성수면과 임실군의 상징이며, 성수면에서 태어났음은 면민들의 자랑이요 임실군민들의 자랑으로, 군민모두에게 자긍심을 높이 심어주신 분이다.

-최성미 임실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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