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만덕산 미륵사는 겨울 수행중
천년고찰 만덕산 미륵사는 겨울 수행중
  • 하대성
  • 승인 2009.12.1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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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다큐<길>곰티재 20리 길
“방금 적의 기세가 어지러워서 임금께서 가마를 타시고 파천하시니 집안일은 물을 겨를이 없어 편지 한번 내질 못했다. 아비는 용인에서 돌아왔는데 다행한 일은 장병 한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신병도 없는 것이다. <중략> 나는 살아남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겠으니…….어제 듣건데 적이 수없이 금산에 다가왔다기에 금방 목책을 설치하고 있는데 웅치와 이치 구간이 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새 군무는 네가 알바 아니다. 국운이 불행하여 신하가 적과 싸워 죽는 것은 그 분이어서 내 옷과 투구와 갑옷에 성명을 쓰고 새겨서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내가 군부을 위하여 죽는 마음으로 너도 너의 아비의 유해를 찾아내야 한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 웅치 진중에서 김제군수 정담이 그의 아들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다. 대혈투를 앞두고 달밝은 밤에 자식에게 편지를 쓴 정담. 그의 ‘죽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죽음을 앞두고 투구와 갑옷에 이름을 쓰는 심정은 또 어떠 했을까. 국운이 풍전등화인데 내 안위를 어찌 우선하랴. 정담의 죽는 마음을 가슴에 담고 곰티재길을 걷기시작했다. 조금은 무겁고 경건하게.



곰티재 20리 길은 자갈길이며 숲길이다. 완주군 소양면 원신촌마을에서 진안군 부귀면 부암마을 입구까지. 화심에서 삼중마을을 거쳐 신촌마을까지는 5㎞ 거리다. 원신촌마을부터 사실상 걷기가 시작된다. 너무 딱딱하지 않고, 너무 푸석거리지 않아 좋다. 싸박 싸박, 작은 자갈끼리 서리 몸을 비비는 느낌이 발바닥에 전달된다. 오솔길, 밭길, 흙길, 산길 등 여러 길을 걸어온 발도 안기는 모양이다. 삭풍이 목덜미를 파고 든다. 춥다기 보다는 상쾌한 느낌이다. 경관이 포근하다. 약간 비탈길을 따라 가면 두 개 동의 공동주택이 나타난다. 수십 세대가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안 사는 것 같다. 폐허가 된 상태다. 을씨년스런 날씨에 폐허된 집들을 만나니 왠지 음산스럽다. 조금 더 가면 종교시설에서 운영하는 기도원과 연수원이 나온다. 이 건물 또한 낡아 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안에서 모여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맞은편 우리에는 사슴 2마리가 긴 목을 틀어 우둑켜니 길손과 눈을 맞춘다. 마치 기념사진 한장 찍어달라는 표정으로. 이 곳을 지나자 숲길은 급좌회전을 틀며 산길로 바뀐다. 우측은 성벽처럼 깎아진 바위가 도열해 있다. 까무잡잡하고 육중하다. 목을 뒤로 힘껏 젖혀야 바위 정상을 볼 수 있을 정도다. 바위 틈으로 소나무가 뿌리를 박고 있다. 끈질긴 생명력이다. 바위를 뚫고 양분을 끌어올리는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걸까. 처절한 절박함일까, 태생적 환경적 적응력일까.

전에는 진안에서 전주를 오가는 가장 빠른 길이 곰티재였다. 사람들 왕래가 빈번하다 보니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1972년 현충일에 학생들이 탄 버스가 굴러 수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길의 운명이 바꿨다. 모래재는 열리고 곰티재는 닫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래재 또한 잦은 사고와 겨울철 도로 폐쇄 등이 잇따르면서 30여년간 달린 바통을 소태정 길로 넘겼다. 큰 사망사고로 인해 새로운 길, 안전한 길을 연달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소태정 길과 곰티재 사이에는 다섯개의 길이 있다. 원님길을 포함하여 조선시대 옛길 3개가 아직도 건재하다. 길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조선시대 길, 일제 강점기시대 길, 한국전쟁길, 근대화의 길, 현대의 길이다. “할아버지한테 들은 얘기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6.25때 신촌마을 근처에서 빨치산 소탕이 벌어졌다. 대낮에 콩볶는 소리가 요란했다고 한다.” 오기봉씨(65·소양 월상마을)는 당시 들은 얘기를 회상하며 곰티재 스토리를 엮어냈다.





걸은지 20여분이 되자 우측에 비석 2개가 마중나왔다. 오래된 금석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1백미터정도 더 가자 오른쪽 만덕산 기슭에 ‘미륵사1㎞’안내판이 보였다. 만덕산은 완주군 소양면, 상관면과 임실군 성수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높이는 761m. 일만만(萬)과 큰덕(德)를 써서 ‘만인에게 덕을 베푸는 산’이라 불리고 있다. 또 고구려 보덕 스님이 창건한 만덕사(萬德寺)에서 이 산의 이름이 유래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인근 주민들은 부처산이라고 부른다. 일만가지 덕을 지닌 인물은 부처님 외에는 없다는 뜻에서라고 한다.

육산과 암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만덕산의 숨겨진 절경은 만덕폭포와 미륵사다. 미륵사 안내표시를 지나 10여분을 오르면 길 왼편에 지난 94년 겨울에 만덕폭포 빙벽훈련 중 추락해 숨진 고(故) 온명섭씨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조성되어 있다. 이 추모비를 지나 산을 조금만 더 오르면 멀리 대둔산까지 볼 수 있는 조망점이 펼쳐진다. 조금 더 오르면 미륵사로 가는 길과 만덕폭포로 향하는 갈림길. 미륵사로 가기전에 만덕폭포를 만나기 위해 왼쪽 계곡 길을 택해 10여분 가면 폭포가 나온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적어 물안개는 볼 수 없었지만 폭포를 감상하며 휴식를 취하기에는 충분했다. 만덕폭포를 지나 왼쪽 돌무더기 길을 조금 오르면 미륵사. 산을 오른 사람들이 하나 둘씩 쌓아올린 돌탑이 산사를 찾은 길손을 반긴다. 천년고찰인 미륵사(彌勒寺).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철재 대문이 부처님의 도량과 속세를 구분해 준다.행정구역은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산 30번지. “미륵사는 백제 위덕왕 때(재위: 554∼598) 법사(法師) 지명(知命)이 자신의 수도처로 삼으려고 세운 작은 암자였다. 하지만 절의 중창비나 문헌이 없어서 미륵사가 창건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법당 안에 봉안된 신중탱화에서 미륵사 이전의 옛 사찰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광서 18년 임진(1892년)에 조성된 이 탱화에는 ‘만덕산 금강암(金剛庵)봉안’이라는 명기가 있다.” 유종권 전북생명의 숲 이사는 “이 같은 사실을 미뤄보아 미륵사가 있기 전에 ‘금강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 언제 누가 미륵사란 이름으로 바꿨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만덕산과 함께 오랜 역사를 함께한 미륵사는 한국전쟁 때 많은 피해를 입었다. 법당과 요사채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으며, 한국전쟁에 의해 소실된 것을 다시 중수했다. 새로이 중수된 법당은 함석지붕으로 둘러싼 건물 안에 예전 건물의 공포와 처마가 조성되어 있는 2중구조로 지어졌다. 미륵사의 자랑거리는 인법당 뒤편 바위에 위치한 돌탑이다.이 돌탑에는 조선시대 고승인 진묵(震默) 일옥(一玉: 1562∼1633)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모전석탑 형식을 보이고 있는 높이 2m의 이 돌탑은 자연암석 위에 탑신과 옥개를 2층으로 조성하고 상층부는 자연석으로 보주를 삼았다. 진묵대사가 탑을 조성할 때 동자에게 도술을 써서 탑에 쓸 돌을 날라 오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미륵사 인근에 진묵대사가 수도했던 석굴이 있었으며, 이 석굴에는 하루에 3명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미륵사는 원불교와 관련이 있는 사찰로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상종사가 수행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도 원불교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미륵사까지 가끔씩 산책한다는 최춘호씨(54·월상마을). 최씨는 “10여미터 만덕폭포는 물이 많은 여름이 장관이다. 폭포수로 물안개가 자욱히 끼면 전설의 한 장면속으로 빠져 드는 기분이다.”며 눈을 지고 머리속으로 그림을 그리는 표정을 지었다.



.‘ 쐐액∼쐐액∼’

난데없이 괴음이다. 자동차 질주소리다. 익산-포항간 고속도로, 거대한 교각이 버티고 서있다. 이쪽 산과 저쪽 산을 잇는 다리다. 높이가 100여 미터로 국내에서 가장 높은 교각이라고 한다. 도란 도란 얘기를 나누다 만난 불청객이다. 만덕산의 귀를 아프게 하고 미륵사의 이마를 찌뿌리게 할 것 같다. 그 위를 달리는 사람들은 빨라서 좋겠지만, 그 밑을 느릿 느릿 걷는 사람들은 귀를 막아야 할 지경이다. 처음엔 웅장하게 보이던 것이 자세히 보니 참으로 멋대가리가 없다.교각 허벅지에 쓴 커다란 ‘한국도로공사’ 페인트 홍보글씨가 꼴볼견이다. 글씨를 쓰든,그림을 그리든지 숲과 길과 좀 어울려야 할것 아닌가. 다리 배수로를 통해 흐르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니 언짢은 기분이 약간 풀렸다. 곰티재 중간 급경사구간엔 으레 차량 추락방지용 콘크리트 방벽이 쌓여있다. 전에 이 방호벽에는 ‘식량증산 300만석 돌파운동’이란 구호가 씌여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끼와 세월 떼가 덮고 있지만 글씨 흔적은 남아있다. 박종열씨(68·삼중마을)는 주막집 얘기를 꺼냈다. “월상과 신촌마을 중간 절골에 주막이 이었다. 출출할때 친구들과 종종 막걸리를 마시려 다녔다. 20평 남짓한 초가에 10평 모정이 있어 인근에서 사람들이 많이들 왔다. 친척 고모부가 운영했다. 그 후손은 지금 금산에서 살고 있다. 연락은 통 안된다.” 박씨는 그 당시 버스는 반드시 이 주먹에서 엔진을 식히는 물을 차에 채워서 곰티를 넘어갔다고 한다.

웅치정상이다. 눈앞에 진안군 부귀면 도로표지판이 들어온다. 좌측에는 웅치전적지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 옆길로 조금가면 전적비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우리의 조상들이 왜적에 맞서 전투를 벌인 현장이다. 왜군은 해로를 통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장악하려고 했으나…….” 웅치전적비는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진안을 거쳐 호남의 중심인 전주성으로 향하던 왜군에 맞서 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을 기리고 웅치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하태규 전북대 교수는 “완주지역은 임진왜란기 호남 중심지인 전주부를 수호하고 나아가 호남방어를 이뤄 조선을 구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전적지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검토를 통해 사적지로 지정해야 한다.”며 전적비 주위를 꼼꼼히 살폈다. “바스락 바스락, 거기 누가 있습니까?”계곡쪽에서 사람소리가 났다. “그 쪽에 길이 있습니까?”사냥꾼들 3명이 나무사이로 언뜩 보이며 소리쳤다. “예. 이쪽으로 오세요. 뭐 잡았습니까.”외치니 “멧돼지 한마리 잡았습니다. 5마리를 봤는데, 놓쳤습니다.” 그들은 사냥지역인 완주 신촌쪽 계곡에서 멧돼지를 잡아 곰티재로 끌어 올렸다. 꿩대신 닭이라 했던가. 곰티재에서 곰대신 멧돼지를 잡은 것이다. 곰티재 정상에서 바라본 전주지역은 구름 몇점 걸린 평화로운 모습이다.

곰티재를 넘었다. 진안 부귀다. 바로 우측에는 옛길로 연결된다. 멀리서 보면 산 기슭으로 동네를 연결하는 길같다. 중간 중간 윤곽만 보일 뿐이다. 10분쯤 걸었을까, 신정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물이 가득 차면 수면위로 어리는 풍관이 환상적이리라. 조금 더 가면 부귀 부암마을. 신라 때부터 부암마을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하루에 버스가 세 번 들어온다는 이 마을을 마지막으로 자갈길은 끝난다.

기획취재팀=하대성·추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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