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명은 기계처럼 움직인다
99명은 기계처럼 움직인다
  • 정은균
  • 승인 2018.05.0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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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균의 학교뎐 <5>
 근대 시기 전 세계에 학교의무교육 시스템의 단초를 제공한 국가는 독일이었다. 그런데 미국 공립학교 교사 존 테일러 개토는 독일식 학교의무교육 시스템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 발 더 나아가 국가에서 강제적으로 실시하는 학교교육의 목표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불온하고 삐딱하며 오만한 반학교주의자의 마타도어일까, 아니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학교교육의 진실을 담고 있을까.

 개토는 자신의 저서 <바보 만들기>에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사고 통제’나 ‘지성 말살’과 같은 말들을 거론했다. 이 말들을 포함하여 그가 학교가 담당하는 음습한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 들고 있는 몇몇 근거들을 보면 후자쪽에 가까운 것 같다. 가령 나는 20세기 초경 미국 교육부장관이었던 윌리엄 토리 해리스가 남겼다는 말이 과장적 비유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는 “학생 100명 가운데 99명은 기계처럼 움직인다. 이미 정해진 길을 따라 걷고, 이미 굳어진 관행을 따를 뿐이다”라고 말했다.

 개토에 따르면 해리스는 나이에 따라 학년을 가른 교실을 만드는 등 미국 공교육 역사에서 학교를 규격화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육은 개인을 예속시키는 것’, ‘과학적인 교육은 개인을 로봇처럼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런 생각은 “학교의 궁극적 목표는 아름다운 강당이 아닌 어둡고 답답하고 누추한 곳에서 더 잘 실현될 수 있다. 학교는 물리적인 자아를 지배하고 본성의 아름다움을 능가해야 한다”, “학교는 바깥 세계와 단절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라는 말에 잘 담겨 있다.

 해리스의 생각과 말들은 학교가 개인을 어떻게 도구화할 수 있는지를 차갑게 보여준다. 교육사를 거칠게 일별할 때, 개인을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다루면서 다른 목적을 위해 도구화하는 해리스 유의 교육은 19세기 후반기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윌리엄 보이드의 분석을 빌리면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 100여년이 되는 시점인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서구 여러 나라에서 공공 기금으로 운영되는 보편적 초등교육이 국가정책의 내면적인 목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보이드는 이 시기에 발흥한 모든 사람과 모든 목적을 위한 공공적 초등교육이라는 교육적 조치가 인간 역사상 교육과 관련한 종래의 사고방식에 대한 혁명적인 도약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계급 구분 없이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자, 국가의 조치에 크게 의존하는 교육이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시도였기 때문이다. 학교가 교육이 이루어지는 핵심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교육의 중심이 학교라는 공간에 단단하게 얽매이게 되는 시대가 도래하자 교육에 관한 담론의 흐름 역시 크게 바뀌었다. 보이드의 논점에 따르면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교육이론(교육사상이나 교육철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감소하는 대신 교육의 실제, 곧 교육제도나 교육활동의 영향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교육은 학교와 같이 공공적 지원을 받는 기관에서 일어나는 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국가의 투자나 법률이나 제도와 불가분으로 연결되는 문제처럼 인식되었다. 교육이 정치 선거나 경제 동향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가르치는 국가”라는 보이드의 용어를 빌려 쓰려고 한다. 가르치는 국가는 전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를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프랑스 특유의 대학입학시험 바칼로레아와, 이와 연계되는 초·중등교육 시스템이 마련된 때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나폴레옹 시대였다. 이 시기 프랑스는 국가가 시험을 독점하는 시스템을 운용하면서 학생들을 국가 관리 체제 아래 가르치는 교육의 전형적인 보기를 보여주었다.

 다만 프랑스는 공화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혁명 유산 덕분이었는지 교육의 기본 기조가 엄격한 국가 통제를 핵심으로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교육이 비교적 온건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 같다. 반면 일본은 가르치는 국가 시스템 아래서 엄한 아버지 이미지를 주조로 하는 강경한 통제 교육을 완벽하게 구현해 낸 대표적인 국가였다.

 1868년 일본 열도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미증유의 개혁 과업을 받아들이면서 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급격하게 변신하기 시작했다. 이때 교육이 그러한 과업 실천의 선봉에 섰다. 일본은 프랑스에서 발흥한 국가 통치 철학으로서의 폴리스(police)론을 철저한 교육국가론으로 변용하여 받아들임으로써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시로즈 히로노부(2017), <폴리스로서의 교육: 교육적 통치의 아르케올로지>, 학이시습, 427쪽」

보이드는 이러한 일본의 시도가 서구 교육의 개념과 제도와 방법을 국민의 총체적인 방향 전환에 근본적으로 적용한역사상 최초의 사례라고 평가했다.

 1872년 도입된 일본의 근대식 학교제도는 철저한 의무교육이었다. 당시 <학제> 서문에는 “마을에 배우지 못하는 집이 없고, 집집마다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한다”라는 방침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취학률이 매우 낮았지만 메이지 15년경에 이르러 학령 아동의 소학교 취학률이 50퍼센트를 넘어섰다. 「역사교육자협의회 엮음, 김한종 외 옮김(2012), <학교사로 읽는 일본현대사>, 책과함께, 14쪽」

 일부 지역에서는 취학률을 높이기 위해 가로와 세로가 각각 4센티미터와 6센티미터인 나무 앞면에 ‘취학’이라는 소인을, 뒷면에 학생 성명을 기입한 패찰을 아동들이 의무적으로 휴대하게 하고, 미휴대 아동에 대해서는 경찰이 부형(父兄)을 심문하고 훈계하는 방법까지 취했다고 한다. 메이지 정권은 1872년 학제 공포 이후 교육령 제정(1879년)과 소학교령 공포(1886년) 등을 통해 1900년대 초반 실질 취학률을 90퍼센트 가까이 끌어올렸다.

 메이지 이후의 일본 교육은, 교육으로 국가를 변형시키고 국민 정신을 개조하는 데 국가가 핵심 책임자 구실을 담당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일본은 그러한 일을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불과 20년 만에 해내었다. 그러한 거대한 변화의 주축을 담당한 것이 학교였음은 물론이다.

정은균 군산 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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