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소설] 허채원의 ‘파티, 파티’
[신춘문예][소설] 허채원의 ‘파티,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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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2.27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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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물먹은 파지처럼 늘어져 있었다. 발톱이 길었고 수염은 오래 자르지 않은 풀처럼 수북했다. 여름인데도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었고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들추고 자세히 들여다본다. 주름의 골이 깊고 광대뼈가 보일 정도로 볼이 파였지만 아버지가 맞다.

 아버지를 맨 먼저 발견한 사람은 같이 이 동네를 떠돌며 노숙하는 사람이었다. 재개발 예정지인 이곳은 사람 사는 집보다 빈집이 더 많다. 이 동네에서 그와 아버지는 오래 노숙을 했고 아버지가 며칠째 무료급식소에 나타나지 않아 혹시나 해서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는 것이다.

 다시 얼굴을 어루만져 본다. 하얗게 굳어 있다. 교문 앞에서 늘 손 흔들어 주던 자상했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세상의 어떤 것이 그렇게 모질고 악착같았는지 두 손을 꼭 쥔 채 누워 있었다.

 “배낭 속에 사진이 들어 있었는데 사진 뒤에 김은혜 씨 이름하고 전화번호 적힌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까 통화하실 때 딸이라고 하셨지요?”

 “네, 딸입니다”

 나는 정말 딸일까, 뼈와 살을 나눈 딸이라면 이 지경까지 아버지를 방치할 수는 없다.

 “그렇군요. 어르신이 혹시 이런 모습으로 발견 되실까 봐 연락처를 남긴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외상의 흔적은 없습니다. 타살의 정황은 없지만, 더 조사가 필요하시면 현장을 이대로 보존 하도록 하겠습니다만,”

 이곳에서 이런 죽음을 몇 번 발견 했다는 듯 파출소 순경이 짐작하여 말했다. 쇳덩이로 된 돈 되는 것들은 이미 모두 뜯겨 나가고 쓸모없는 콘크리트와 낡은 나무틀과 버린 가구들만 남은 허름한 빈집 바닥에는 종이상자가 깔렸고 어젯밤 내린 폭우로 빗물이 새어 들어와 아버지도 상자도 젖어 있었다. 앙상하게 드러난 팔목의 수술 자국은 언제 생긴 것일까, 도대체 얼마나 오래 저런 모습으로 떠돌았던 것일까...., 울음보다 더 묵직한 것이 가슴을 짓눌러 오히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쯤 되면 딸은 주저앉아 통곡부터 해야 했다.

 “아니에요. 바로 병원으로 옮겨주세요”
 아버지를 더 오래 여기에 둘 수 없었다. 현기증이 나고 온몸이 떨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실장님, 어디세요? H그룹 사모님께서 약속시각이 지났는데 오지 않는다고 난리에요”

 재촉하는 윤 대리의 전화였다. 아버지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오느라 주 여사님과의 약속을 깜박 잊었다. 모그룹 사모님의 주선으로 H그룹 회장의 팔순 파티를 우리 회사에서 기획하여 진행하게 되었고 국회의원의 장인이자 VIP급이어서 실장인 내가 직접 맡아 진행하는 중이었다. 자택에서 하는 가든파티라 준비할 것이 만만치 않았다. 파티를 며칠 앞두고 주 여사는 몇 가지 컨셉을 변경하고 싶다고 알려 왔다.

 구급차가 아버지를 싣고 병원으로 떠났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아버지의 손가락을 펴본다. 평생 대패질을 하고 못을 박던 거친 손이지만 내가 아플 때 이마를 짚어주고 위험한 길에서 내 손을 움켜쥐던 따뜻한 손이었다. 하지만 주먹을 꼭 쥔 채 굳은 아버지의 손가락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구급대원은 그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억지로 손가락을 펴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를 살핀 의사는 심장마비로 사인을 적었고 나는 동의 했다. 곧바로 장례식장이 마련되고 호적에는 아직 딸로 되어있으므로 상주는 내가 되었다.

  *

 아버지를 처음 만난 건 여덟 살 때였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어느 다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를 보고 일어선 남자는 양복을 입고 있었으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크고 헐렁해 보였다. 마르고 엄마보다 키는 작았지만, 눈에 쌍꺼풀이 깊게 드리워진 순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네가 은혜구나”

 그는 내 뺨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나는 낯선 남자의 손을 피해 엄마 뒤로 숨었다. 그는 내게 오렌지 주스를 건넸다. 엄마의 눈치를 보자 엄마가 어서 받으라는 듯 눈짓을 했다.

 “반갑다. 은혜야”

 그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은혜야, 앞으로 너의 아버지가 되어 줄 사람이란다.

 엄마가 그를 내게 소개했다. 하지만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와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였다. 태어나자마자 만난 사람은 엄마와 할머니뿐이었으므로 아버지의 존재감이라든지 내게 어떤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인지 몸으로 마음으로 느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있는 친구들은 아버지에게 혼이 나기도 하고 장난감을 사주거나 놀이공원을 가고 외식을 시켜주기도 했다. 내게 그런 역할을 해준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대학교 앞 작은 주점 딸이었다. 한 대학생의 참지 못한 취기로 불행하게도 주점 다락방에서 내가 생겼다. 외할머니 전언에 의하면 그 남자는 나를 두고 실수라고 했고 엄마는 마음이 시킨 일이라고 우겼다.

 제법 책임감이 있었던 그 남자는 엄마를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했으나 지방의 있는 집 자식이었다는 남자의 집에서 주점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딸을 며느리로 받아 줄 리 없었다. 내가 있거나 없거나 그 집에서는 상관없다고 말하며 삼류 드라마처럼 그 집의 횡포에 나는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나를 지켜 낸 건 엄마였다. 그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이민을 했으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건 아마도 엄마와 외할머니가 술을 마실 때마다 욕을 해댄 탓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술을 자주 마셨다. 엄마는 술만 마시면 말했다.

  “네 아버지는 너와 나를 버리고 절대 오래 못 살 것이다. 내가 가만 안 둔다!”

 엄마와 할머니가 하는 욕과 술주정이 싫어 귀를 막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 아버지 아니 그 남자는 엄마 때문에 분명 오래 못살 것이라 그때 생각했다. 엄마의 바람은 유치원에 입학 할 때쯤 이루어졌다. 하지만 엄마는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밤새 술을 마시고 울었다.

 엄마는 나이트클럽 주방에서 일했다. 같은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의 소개로 아버지를 만났다. 일찍 부인을 잃었으며 아들 하나를 두고 있고 부유하지는 않지만, 기술을 가지고 있어 은혜 학교는 걱정 없이 보낼 거라고 소개를 했다. 아버지에게 나 보다 다섯 살 많은 아들도 있었다. 오빠라고 부르기까지 오래 걸렸으나 오래 불러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와 오빠는 한집에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목수였고 엄마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아버지는 포근하고 자상했다. 입학식에 꽃다발을 들고 오거나 발표회에 와서 열심히 손뼉을 치고 놀이공원을 데려가고 외식을 시켜주었다. 비 오면 우산을 가져다준 사람도 아버지였고 잠들기 전에 내 방에 마지막으로 들어와 보는 사람도 아버지였다.

 옆 장례식장은 신발이 포개질 정도로 조문객이 넘쳐난다. 애도의 말과 함께 술과 안주가 계속 들어오고 부의 봉투를 든 사람들이 모두 슬픈 표정을 지으며 줄을 섰다. 서로 명함을 건네기도 하고 누군가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자지러지게 울다가 그치기도 했다. 상주는 조문객과 인사를 하느라 슬픔 틈도 없어 보였다. 빈 부의 봉투처럼 허전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는 달랑 내 신발 한 켤레, 울음은 고사하고 흐느낌조차 없다. 이름을 불러주는 이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다. 황당하고 허망한 죽음 앞에 나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직원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 울지 않는 상주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태생이 외로운 사람이었다. 함경도에서 제법 부유했던 집안의 손자였지만 아버지의 부친이 다섯 살 된 아버지만 품에 안고 홀로 피난 왔다고 했다. 아홉 살 때쯤 부친이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고아가 되었다. 늦은 나이에 결혼은 했으나 상처를 하고 피붙이라고는 오빠 하나뿐인 사람이었다.

 제단에 놓을 영정 사진도 없다. 장례식장 직원이 휴대폰 사진도 부분 발췌해서 영정사진으로 인화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사진은 집에 불났을 때 다 타버리고 너무 오래 헤어져 있어 최근 사진 한 장 내 휴대폰엔 남아 있지 않았다.

 사진도 없고 꽃도 없고 향도 피우지 않은 향로만 단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옆 장례식장에는 검은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있다.

  ‘하느님, 옆 칸에 있는 우리 아버지도 함께 천국으로 인도해주세요’

 속으로 되뇌며 앉아 있는데 서류를 든 직원이 와서 장례 물품 등에 관해서 의논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가족은 없나요?”

 “네, 없어요.

 초점을 잃은 듯 보이는 눈빛을 읽은 직원이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며 나간다. 가족이라고 가족에 대해서 어느 지점에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식장 벽에 기대 넋 놓고 앉아 있는데 주 여사의 전화가 왔다. 전화하겠다고 해놓고 경황이 없었다.

 “김 실장, 약속도 안 지키고 연락도 안 되면 어떻게 해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제게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그래도 그렇지 행사가 모레인데 할 일도 많고……. 김 실장 이러면 안 되지!”

 까칠하고 도도한 그녀의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나와 장례식장을 맴돈다. 아버지의 죽음을 주변에 알릴 수 없었다. 아버지와 10년을 한집에 살고 오래 떨어져 살다 6년 전 한 번, 밖에서 만난 것을 제외하고 다시 만나지 못했으므로 이미 내게는 없는 아버지였다. 직원들이나 친구들 그리고 여기저기 경조사에 발품을 팔았던 지인들에게 부고장을 보낼 수 없었다.

 주 여사는 짜증과 조바심을 냈다. 팔순을 기념하기 위한 가든파티지만 유명 정치인들, 재계 인사들이 주빈으로 참석하는 자리다. 서로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행사이기도 했으므로 파티의 성공은 곧 주 여사의 업적으로 시아버지인 회장에게 자신의 능력과 충성심을 확인시키는 자리다. 빈 장례식장에 아버지 혼자 둘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장례식장을 비우고 주 여사 댁으로 갔다.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죄송해요. 사모님 제가 피치 못할 사정이 갑자기 생기는 바람에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몇 군데 컨셉을 바꾸고 싶다고 하셨나요?”

 주 여사는 다른 대기업 사모님들보다 더 깐깐한 여자다. 두 달 전 모그룹 사모님을 통해 주 여사를 만났다. 대기업 안주인들 대부분이 그러하지만 그중에서도 주 여사는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컨셉과 테마를 설정할 당시부터 남달랐다. 하지만 파티플래너로 일한 지 벌써 10년이 넘는 경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로 부유층 파티를 맡아 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온 터라 이번 행사 역시 자신감을 가지고 추진하고 있었다. 대부분 사모님들이 플래너들의 의견을 귀담아듣는 편이어서 파티가 기대에 못 미칠 경우 불평이 쏟아지곤 하지만 주 여사는 스타일링 컨셉부터 테마, 테이블 세팅, 식음료, 플라워데코 심지어 케이크 장식과 출연자, 스티커 하나까지 일일이 간섭했으므로 모든 것을 기획하고 연출해야 하는 플래너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쉬운 고객이기도 했다. 주 여사의 의도를 파악하고 제시해주는 컨셉에 최대한 맞추기만 하면 되었다.

 “어떤 부분을 더 추가 하고 싶으신지요?”

 주 여사는 음식부터 해서 몇 가지 추가 또는 변경해야 할 것을 알려주었다.

 “꽃을 저 돌계단 위에서부터 장식하기로 했는데 그러지 말고 대문에서 돌계단까지도 꽃을 놓아주세요. 들어설 때부터 잔칫집 분위기가 나야 하니까. 현관에 들어 설 때부터 그 집 안주인의 안목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거든. 나는 평범한 건 싫어.‘

 “그럼 꽃은 어떤 꽃으로 준비할까요?”

 “요즘 어떤 꽃이 좋을까……. 그건 김 실장이 좀 알아서 해줘요. 전문가니까, 화려하고 따뜻한 색감이 나는 것으로...,이왕이면 좀 귀한 꽃으로 해줘요. 차고 넘치는 것들 말고”

 주 여사는 한 번 보고 지나치거나 어쩌면 아무도 들여다봐 주지 않는 곳까지 꼼꼼하게 점검했다.

 “제가 꽃시장에 가보고 마음에 드실 만한 꽃 몇 종류를 사진 찍어 사모님께 보내드리겠습니다. 다른 지시사항은요?”

 “참석한다는 국회의원들이 몇 분 더 계셔요. 회장님 테이블 근처에 테이블 하나 더 마련해주세요.”

 주 여사의 지시사항을 받아 적으면서도 머릿속에는 텅 빈 아버지의 장례식장이 염려되었다.

 “그리고 더 변경하실 건 없으신지요.

 “팝페라 하기로 한 거요. 아무리 생각해도 고윤성 씨보다 여자가 낫지 않을까요. 왜 있잖아요. 박수진인가? 얼굴이 조그맣고 예쁜, 텔레비전에도 요즘 자주 나오던데…….손님들이 대부분 남자라서 여자면 좋겠어요.

 “행사가 모레라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돈은 달라는 대로 준다고 하세요. 그럼 할 거야”

 “일단 박수진 씨 측에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더 변경하실 사항은 없으신지요?”

 주 여사는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행사 날은 늦지 말고 일찍 와서 준비 좀 해줘요. 나 이번 행사 K그룹 사모님이 김 실장이 유능하다고 해서 믿고 맡긴 거니까 실수하거나 하면 안 돼요. 이건 단순한 팔순 생일 파티가 아닌 거 알죠?”

 “예, 사모님 그날은 일찍 와서 준비하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난감했다. 모레면 아버지의 발인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침 일찍 발인하고 화장장에서 봉안당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다. 주 여사의 파티는 늦은 오후에 하는 행사지만 리허설은 미리 가서 해봐야 한다. 파티 날은 가장 긴장해야 하는 순간이다. 연출자가 그동안 준비한 극을 무대에 올리고 관객이 돌아가고 난 뒤가 끝이 아니라 평가가 끝인 것처럼 현장인력과의 리허설,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감동의 시간과 만찬이 끝나고 내빈이 퇴장하고 주최자의 감상평이 파티의 끝이다.

 사무실에 변경 내용을 통보하고 꽃시장으로 가서 꽃을 살폈다. 비싼 꽃이라니. 꽃에도 귀하고 천함이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했다. 전문가니까 믿고 맡긴다는 말은 전문가를 더 불안하게 한다. 몇 장의 꽃 사진을 찍어 주 여사에게 보냈다. 주 여사가 결정을 해주면 꽃을 집으로 배달할 수 있도록 해놓고 꽃시장을 걸어 나오다가 수국 한 다발을 샀다. 알코올성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엄마를 찾아갔다. 아버지의 소식을 알려야 했다. 10년 가까이 살 맞대고 살아온 엄마만큼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알아야 했다. 혼자 사는 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엄마는 나와 살기를 거부하고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창가 쪽 병상에서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햇살이 이불처럼 엄마를 덮고 있었다.

 “엄마, 나왔어”

 엄마가 등을 돌렸다.

 “은혜 왔구나!”

 날이 좋아서 그런지 오늘은 곧바로 나를 알아본다. 가끔 딸이나 친구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존댓말을 쓰곤 했다.

 “아픈 데는 없어요?”

 “나는 괜찮다. 수국이구나.”

 “엄마가 좋아 할 것 같아서.”

 엄마는 수국 잎을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했다. 엄마의 정신이 맑을 때 아버지의 소식을 알려야 했다.

 “엄마, 아버지 찾았어.”

 엄마는 잠시 멈칫했다.

 “어디 있더냐. 그렇게 찾아도 안 나타나더만”

 “근데, 돌아가셨어요. 지금 장례식장에 모셔 놓고 왔어, 가보실래요?”

 엄마가 수국을 내려놓았다.

 “나는 안 간다. 내가 어떻게 거기에 가, 네가 잘 모셔라, 불쌍한 사람이다.”

 늘 당당하고 강단 있던 엄마의 몸이 한쪽으로 기운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엄마가 정신이 맑을 때 아버지의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다행이다. 어쩌면 엄마가 아버지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학년이 될 무렵 아버지와 엄마가 크게 싸웠다. 평소에 아버지는 아이를 원했고 엄마는 아버지와의 사이에 아이 갖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 몰래 오래 피임약을 먹어 오다가 실수로 아이가 생겼다. 아버지는 아이 낳기를 원했고 어머니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는 엄마가 나쁜 생각을 할까 일도 나가지 않고 엄마를 감시했다. 그렇게 버티다 7개월이 되던 해 유산을 했다. 그 아이는 사내아이였는데 아버지의 전언에 의하면 태아인데도 인물이 아주 좋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몇 달 동안 술만 마셨다.

 “네 엄마가 얼마나 독한 줄 아니, 뱃속에 든 아이를 죽이려고 술을 마시고 담배까지 피워 댔다. 의사 말이 폐가 다 쪼그라들었단다. 징글징글하다. 네 엄마”

 하지만 아버지는 다시 일어났다. 될 수 있으면 가족 곁을 지키려고 애썼던 아버지 인데 전국을 떠돌며 팀을 꾸려서 한옥 짓는 일을 시작 했다. 한옥 열풍이 불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는 엄마가 있는 집을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두 달에 한 번 집에 잠시 왔다가 다시 나갔다. 엄마는 아버지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나와 오빠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다 방 두 칸에 작은 가게가 딸린 곳에 구멍가게를 얻어서 잡화와 담배 등을 팔기도 했다. 나와 엄마만 그곳에서 살고 다 큰 남매를 한 방에서 재울 수 없어 오빠는 집 근처 옥탑방에 따로 살았다. 하지만 장사는 잘 안 되었고 동네 여자들이 모여서 화투를 치거나 술을 마시고 노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일 년에 한두 번이지만 아버지는 집에 오면 가장 먼저 나를 찾았다. 늘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는 했지만 “우리 은혜”라고 다정스럽게 불렀다. 엄마와 아버지의 관계는 예전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집에 며칠 머물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주로 나와 오빠하고만 말을 했다. 그러다가 내가 열여덟 살, 오빠가 스무 세 살이 되었을 때 집에 불이 났다. 원인은 담뱃불이었다. 구멍가게에 딸린 방에서 동네 여자들과 술을 마시고 종일 화투를 치다 담뱃불이 옮겨 붙는 줄도 몰랐다. 엄마는 가지고 있던 금붙이와 돈을 챙기느라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에 갇혔다. 길이 좁은 동네여서 소방차가 늦었다. 물을 가져와 붓거나 소방차가 빨리 오기를 기다리기만 할 뿐 누구도 불이 붙고 있는 집에 들어가기를 꺼렸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오빠가 엄마를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가게에서 팔던 인화 물질이 폭발하면서 불은 집보다 커졌다. 화상을 입고 연기를 많이 마셨지만, 엄마는 살아나고 오빠는 석 달 병원에 있다가 죽었다.

 “은혜야, 네 엄마가 내 두 아들을 잡아먹었구나.”

 아버지는 오래 힘들어했다. 일도 하지 않고 방에서 또 술만 마셨다. 나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와는 도저히 한집에 살 수 없다는 아버지는 연장통과 옷가지들만 챙겨 멀리 지방으로 떠났다. 엄마 또한 그렇게 떠나는 아버지를 잡거나 하지 않았다.

 그 후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살던 동네를 떠나 더 외곽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대문 앞에 서성이고 있었다. 행색은 초라했지만 나는 어둠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네가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지난번에 살던 동네에 가서 물어봤다. 이리로 이사 갔다고 알려주더구나.”

 조용히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더 작고 야위어 있었다. 엄마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으므로 근처 식당으로 가서 함께 소주를 마셨다. 거처는 없고 지금도 전국을 떠돌며 목수 일을 한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내 전화번호를 주고 아버지의 연락처를 받았다.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서로 안부는 전하고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는 사진 있으면 한 장 달라고 했다. 내가 보고 싶을 때 꺼내 볼 거라고 했다. 해외 출장 때문에 찍어 둔 여권 사진 한 장이 마침 지갑에 있었다. 아버지는 사진을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아버지를 만난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한동안 서로 연락을 하고 지냈고 아버지도 간간이 전화를 걸어왔다. 점점 전화가 뜸해지고 연락 안 되는 일이 많아졌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은 3년 전의 일이었다. 진주에 있다고만 했다. 아버지의 행적은 거기에서 끊겼다. 그 뒤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진주에 내려갔지만, 생각보다 큰 도시였고 몇 군데 공사현장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대며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전화번호도 바꾸지 않고 아버지가 다시 연락해 오기만을 기다렸다.

 “너무 안에만 있으면 안 돼 엄마 햇살 좀 보자”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밖으로 나왔다. 여름 햇살이 뜨겁게 내렸다. 엄마는 휠체어에 나는 의자에 앉아 그늘을 늘리고 있는 느티나무만 바라보며 서로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다. 술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떤 기억을 빨리 닫고 싶어서인지 또래보다 조기 치매가 왔다.

 “엄마, 엄마는 왜 그렇게 아버지에게 독하게 했어?”

 엄마는 잠시 말이 없다.

 “난 은혜 네가 전부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한 줄 아니, 다 너 때문이다. 나는 너 하나만 잘 키우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다리가 없는 사람이라도 돈만 있으면 됐었다. 그때 나는”

 엄마가 옛 기억을 떠올리면서 표정을 찌푸렸다. 오로지 너 하나만 보고 살아왔음을 알아달라는 의미의 말투였다.

  “그래서 나는 네 동생 생기는 것도 싫었다. 너한테 소홀해 질 까봐, 이미 있는 오빠는 어쩔 수 없었고”

 엄마는 아직도 단호했다.

 “너 낳아 준 아버지가 그래도 너와 나를 책임지려고 노력했다. 반대하는 부모들 몰래 나를 다시 만나기도 했지. 너의 이름도 그 사람이 지어준 거다. 너의 아버지는 많이 배우고 조용하고 어진 사람이었다. 그 집에서 내 같은 사람 가당찮기는 했겠냐! 나도 안다. 내 평생 남자로 사랑한 사람은 너의 진짜 아버지뿐이다. 그러니 내가 다른 사람 아이를 낳고 싶었겠느냐”

 엄마는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내 앞에서 고해성사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으로 겉돌기만 했던 아버지와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또 다짐하고 행동에 대해 정당화 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끝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어떤 미안함도 애도의 뜻도 표하지 않았다. 그건 어머니의 연애사일 뿐 내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치부하며 아버지를 한 번 더 부정하는 엄마를 참을 수 없었다.

 다시 장례식장으로 왔다. 주민등록증도 없어 영정사진 한 장 없는 장례식장은 지나치게 고요 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종교가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방에 있던 묵주를 꺼내 단에 놓았다. 그리고 벽에 기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장례식장 직원이 왔다. 발인절차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아버님 주민등록증은 있습니까. 주민등록증 사진이라도 확대해서 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주민등록증도 없습니다.”

 “동사무소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전자주민증으로 갱신할 때 찍은 사진이라도 달라고 해보시지요?”

 “괜찮습니다. 문상 올 사람도 없습니다.”

 오래 지방을 떠돌던 아버지가 주민등록증을 갱신 할 리가 없었다.

 “발인은 어떻게 하실는지요. 장지는 정해졌습니까?”

 누군가의 탄생을 기념하는 일, 누군가의 결혼식, 누군가의 회갑 따위의 파티는 많이 치러 왔지만, 누군가의 장례를 기획하고 마무리하는 일은 처음이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도움을 좀 주세요.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오래 못 뵈었고 말씀 못 드릴 사연이 있습니다. 의논할 사람도 없습니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의논 할 상대가 없다는 것은 우주에 홀로 버려진 듯 외롭고 무서웠다.모레는 도무지 발인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직원은 나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그렇다면 발인을 하루 미루자고 했고 나는 동의 했다. 보통 삼일장 홀수로 하는데 사정이 그러하고 그런 격식에 의미가 없다면 H그룹의 팔순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장지는 직원이 소개해주는 봉안당으로 결정했다. 직원은 내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여러 가지 도움을 주기 위해 유가족처럼 움직여 주었다.

 파티가 열리는 날은 전날부터 바쁘다. 야외행사여서 우선 시간대별 일기예보부터 점검해야 했다. 다행히 비는 안 온다. 무대가 만들어지고 조명이 세팅되었다. 테이블 배치는 전날 미리 해두어야 한다. 무대 장식 등 미리 준 배치표대로 했는지 점검하는 일만 남았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바빴다. 일찍 스텝들을 데리고 주 여사의 집으로 갔다. 대문부터 시작해 약 천 평에 이르는 정원은 길고 넓었다. 트럭 몇 대가 집 앞에 정차해 있었고 한 트럭에서 꽃과 화분을 내리고 있었다. 이름과 직위를 매단 축하 화환도 속속 도착한다. 사람보다 꽃이 더 많은 행사였다. 네 시부터 손님들이 당도하므로 그 전에 모른 세팅과 리허설을 마쳐야 한다. 하얀 테이블보가 드리워지고 의자 덮개를 씌우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꽃 배달 온 사람들이 누비고 다녔다. 공식행사를 진행해 줄 사회자도 와 있었고 팝페라 가수도 도착했다. 연주 팀들도 바이올린 등 악기들을 점검하고 악보를 뒤적이고 있다. 정원은 분주히 돌아갔다. 나는 이 파티의 연출자답게 모든 구조물을 체크 했다. 와인과 각종 술이 세팅되고 두 시쯤 식음료 트럭이 당도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 되었다. 먼저 도착한 H그룹 회장의 손자 손녀 또는 증손들이 정원을 뛰어다녔다. 오후 세시가 되자 손님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대문 앞에는 고급 차들이 줄을 섰다. 주 여사는 단아한 자줏빛 드레스를 입고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들이 모두 도착하고 사회자가 순서대로 식을 이어 나갔다. 전체 분위기를 살피며 스텝들에게 지시사항을 그때그때 챙겼다. 주 여사의 남편인 H그룹 대표이사의 인사말과 주인공인 회장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회장의 휘황찬란한 일대기가 소개 된다.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제일 어린 증손녀가 와서 머리에 고깔을 씌우고 얼굴에 입술을 맞추자 회장은 금빛 마침표를 찍은 듯 행복해했다. 나비넥타이를 맨 회장의 증손자가 첼로를 멋지게 켜자 사람들은 손바닥이 붉어져라 손뼉을 치며 환호를 보냈다. 이루어 놓은 것이 많은 사람의 마당은 늘 풍요롭다. 찬란한 이력과 가족소개로 이루어진 공식 행사가 끝나자 음악 연주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셨다. 팝페라 가수의 노래가 끝나고 떠밀리는 척 하며 모 국회의원도 나와서 노래를 했다. 동행한 그룹 안주인들이 파티가 멋지다고 칭찬을 늘어놓을 때마다 주 여사는 나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거나 웃어 보였다. 누군가는 밀담을 누군가는 음식을 먹고 누군가는 음악을 들었다. 연주자들은 악보를 넘기며 열심히 바이올린을 켜고 플루트를 불었다. 80세를 화려하게 살아 낸 회장은 모든 게 자신의 발밑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뿌듯해하며 몇 번이고 건배를 외쳤다. 별이 총총 뜨고 꽃들이 시들 때쯤 손님들이 돌아갔다. 파티가 끝났다. 약간 취기가 있는 주 여사가 다가와서 말했다.

 “김 실장, 파티 완벽했어, 실수 하나 없이 정말 잘했어 당신은 최고의 파티 플내너야, 인정”

 모든 게 최고이고 최상이었으므로 진행만 매끄럽다면 실패할 수 없는 파티지만 주 여사는 몇 번이고 나를 치켜세웠다. 두 달 동안 준비한 무대가 주 여사의 평가로 끝났다. 배우들은 돌아가고 투자자는 좋은 작품이었다고 호평을 했다. 파티가 끝난 자리는 꽃만 시들고 있다. 남은 음식들은 차에 실리고 의자가 접혔다. 스텝들에게 고생했다고 다독이고 뒷정리를 부탁한 후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영정도 조화도 없는 장례식장은 여전히 텅 비어있다. 옆 칸은 이미 발인이 끝나고 새로운 죽음이 들어와 있었다. 조화가 줄을 섰고 여전히 손님으로 넘쳐나서 상주가 슬플 틈도 없이 몇 번이고 밥과 국을 추가시키고 있었다. 소복하게 쌓인 신발들 속에서 자기 신발을 찾느라 바쁜 사람들, 봉투에 이름을 쓰는 사람들, 심지어 호상이라며 건배를 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에게는 죽음도 산 날 만큼 화려했다.

 매일 똑같은 풍경을 만들어내는 옆 장례식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오빠가 살아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에 이른다. 오빠기 있었더라면 장례식장은 오빠의 지인들로 꽉 찼을 것이다. 오빠의 친구들, 직장동료들이 오빠의 직위만큼 조화를 보내고 조문을 했을 것이다. 여덟 살에 만났지만, 오빠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오빠라고 처음 불러 본 건 열한 살이 되고 나서였다. 오빠는 아버지처럼 따뜻한 사람이었다. 오빠는 종이비행기를 잘 날렸다. 공항이 근처에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지붕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며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키운 오빠였다. 똑똑한 오빠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종이비행기 날리는 법을 알고 있었다. 바람의 방향을 읽을 줄도 알았고 비행기의 날개를 조종해서 비행기가 날아가는 방향을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도 있었다. 날린 비행기가 부메랑처럼 나에게 돌아올 때는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공부를 잘했던 오빠는 좋은 대학을 마다하고 항공대에 들어갔고 공군을 다녀왔다. 하지만 오빠는 죽어 한 줌의 재로 하늘을 날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지난 시간이 아버지의 죽음 앞으로 달려와 조문한다. 이 세상에 문상해 줄 사람 없이 외롭게 누워 있을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허물어진다. 이토록 허망한 죽음이 또 있을까…….아버지의 시신을 보고도 장례식장에 안치했을 때도 안 나왔던 울음이 갑자기 쏟아졌다. 큰 소리로 울었다. 가슴을 치기도 했고 머리를 쥐어뜯기도 했다. 하늘에 들릴 정도로 아빠와 오빠를 불러댔다. 아무도 와서 울어주지 않는 외로운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죽음이 외롭지 않을 만큼 다른 사람 몫까지 울어주었다. 옆 칸에 문상 왔던 사람들이 와서 보고 가기도 했고 텅 빈 장례식장을 보고 무슨 사연이라도 있겠다는 둥 수군거리기도 했다.

 울음을 추스르는 동안 직원이 발인에 대해서 이제는 결정해야 한다고 채근했다. 다음날이 발인인데 사진도 없이 아버지를 보내야만 하나 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잡혀 있는데 친구 생각이 났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내 친구 앨범 속의 사진, 불이 나는 바람에 모든 사진은 다 타버렸지만, 친구의 졸업사진 속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아버지는 일회용 카메라를 가지고 참석했다. 나와 내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진을 여러 장 인화해서 사진 뒤에 날짜와 짧은 메모까지 넣어서 함께 찍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초등학교 친구 중에서 유일하게 소식을 나누고 지내는 미경이 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혼해서 부산에 살고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미경이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 듣고 가슴 아파했다. 내 뜻을 알고 앨범 속의 사진을 찍어 휴대폰으로 전송해 왔다. 혼자 치를 장례가 안타까워 내일 당장 올라오겠다는 말을 했지만 말렸다. 보내온 사진 속의 아버지는 젊었고 친구들 틈에서 내 어깨에 손을 얹고 활짝 웃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고 사진관에 가서 아버지의 얼굴만 인화했다. 크고 헐렁한 남의 옷이 아니라 새 옷 한 벌 입으시라고 새 양복과 와이셔츠 넥타이 양말과 속옷 그리고 구두 한 켤레를 샀다. 그리고 꽃시장으로 향했다. 화려한 꽃만 골라 차에 실었다. 풍선과 고깔도 챙겼다. 장례식에서는 볼 수 없는 장미, 후리지아 등등의 화려한 꽃들을 장례식장 안으로 가져오자 직원이 의아해했다.

  “장례식장에는 이런 화려한 꽃을 쓰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곧 발인인데…….”

 “발인을 조금 늦출게요. 그리고 제 아버지 장례식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게요”

 아버지 제단 앞에 국화 대신 장미꽃 테두리가 된 사진을 올렸다. 젊은 날의 아버지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쯧쯧 젊은 사람이 죽었나보네’ 라고 말했다.

 주변에 노란 후리지아도 놓고 백합도 수북하게 쌓아 놓았다. 옆 칸에서 와서 구경하기도 했다. 풍선을 불고 리본을 묶어 제단 곳곳에 묶었다. 빨갛거나 파랗거나 노란 풍선들이 찬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새 옷과 신발도 사진 앞에 놓아두었다. 사진 위에 고깔을 씌웠다. 미리 준비해둔 과일과 케익도 단 위에 올렸다. 향로를 내리고 붉거나 파란 색 향초를 가져와 켜 둔다. 카세트도 준비했다. 오케스트라는 필요 없다. 아버지가 평소 좋아하고 따라 불렀던 가수의 음반을 가져와 틀어 주었다. 식장에 뽕짝이 울려 퍼진다.

 “아빠, 이건 아버지를 위한 파티야, 기억나 내 생일날 아빠가 내게 해주던 거”

 어둡고 칙칙한 상복을 벗어 버리고 밝고 예쁜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에 맞춰 몸을 옆으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버지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둘이서 노래방을 자주 갔으므로 나는 아버지들이 부를 만한 오래된 노래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나 아빠 앞에서 재롱떨어 본 적 없는 것 같아 ”

 나는 한 바퀴 휘 돌아보기도 한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여전히 웃고 있다.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러보기도 했다.

 “어때 노래 잘하지”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는 ‘우리 은혜 백 점이야’ 하고 대답을 했다. 평소 좋아하던 후리지아 꽃향기도 맡고 케익의 촛불도 좋아라 한다.

 “아버지, 아버지 아주 잘 살았어, 내겐 최고의 아버지야, 오래 기억해줄게”

 장례식장 직원이 내 파티를 조용히 지켜봐 주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장례식장을 힐끔거렸다. 누구는 정상이 아니라고 수군거리고 누구는 뭔가 아픈 사연이 있는 것 같다고 위로의 말을 하기도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없다. 우리와 헤어지고 아버지가 어떤 고통과 슬픔을 가지고 많은 날을 보내왔는지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아픔이란 비교적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내 생애 최고의 파티를 기획하고 연출했다. 노래가 끝나고 멍하니 아버지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데 직원이 다가와 발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는 보내야 하는 시간이다.

 “아빠, 오늘 파티 즐거웠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단 위의 촛불을 껐다. 파티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아버지는 고깔을 벗어놓고 구두를 신고 나가다 뒤돌아보며 엄지를 들어 올린다.

 ‘인정’<끝> 

 

    ▶ 당선소감 허채원씨(본명 허영숙·52)

 고열과 기침으로 좀처럼 낫지 않는 지독한 몸살을 앓는 중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때 이마를 짚어주듯 마음을 짚어주는 한 통의 전화, 신춘문예 당선 소식이었습니다. 링거를 맞고 흰 죽을 먹으며 버티던 날들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긴 것일까요. 온몸에 생기가 돌고 입맛이 돌아 왔습니다. 

 중학교 때 대학노트에 첫 소설을 썼습니다. 반 친구들이 돌려 읽느라 너덜너덜 해져 왔을 때 소설가의 꿈을 가졌지만 현실은 길을 열어주지 못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 다시 가장 간절했던 시절로 돌아가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제게 다시 길을 열어주신 전북도민일보에 감사드립니다. 소설에 대해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해 늘 제 자신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에 답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리며 오늘의 기쁨을 스승 삼아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글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하고 격려해준 남편과 힘이 되어준 가족들, 글을 쓰느라 오래 한솥밥을 먹어 이젠 식구가 되어버린 시마을동인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겨울의 한 가운데 있지만 곧 꽃이 필 것입니다. 흰 죽 대신 얼마 전 담근 김장김치와 함께 이젠 밥을 먹어야 겠습니다.

 

    ▶ 심사평 김한창 소설가

  금년 신춘문예 공모는 지난해보다 출품작은 좀 줄었지만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았다. 문학은 시대의 반영이라는 생각을 곱씹으면서 예심과정으로 응모작들을 한 편 한 편 읽었다. 최종 본심에 오른 작품은『혼돈의 시대』『그래도 좋은 날이었다』『파티, 파티』세 편이다. 

  그 중, 원고지에 집필한『그래도 좋은 날 이었다.』는 비현실 세계에서 현실세계를 보거나, 그 반대로 현실 세계에서 비현실 세계를 말하는 서사구조로 시작된다. 문장의 어법이 단조로운 것이 특징으로 미사어구를 배제함으로서 서사의 임펙트를 강하게 어필시킨 것은 독특했다. 또 화자는 관찰자 역할을 하면서 흉악한 범죄자이며 기억장애자인 ‘나’ 의 정신심리 속으로 들어간 것은 서사 본질이 실감나는 효과를 거두었다. 

  기승전결과 후미의 점입가경으로 몰아가는 긴장도 좋았다. 하지만 여러 사람을 쉽게 살인하는 장면들은 암시로도 충분한 부분이었다. 독자의 상상으로 맡기지 않고 생명경시를 편린한 점은 결점이다, 왜냐면, 사회통념의 공감대에 반하기 때문이다. 

 『혼돈의 시대』는 문장의 형식이나 서술, 대사, 모두 기성작가의 작품을 보는 듯 했다. 단락 띠기나 첫 문장과 대사의 들여쓰기 등 전혀 하자가 없는 원고로, 1953년 유엔군과 북한군 대표 간에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 된 때, 회문산을 중심으로 전향하지 않은 공비들의 무장투쟁을 골격으로 격랑의 시대 이야기다. 시대적 배경과 묘사가 탁월 했지만, 단편소설로서 심플 플롯이 결여되고 테마의 중심축이 흐려진 결점과 함축의 묘미가 부족했다. 
  

  당선작『파티, 파티』는 액자소설의 기본 틀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서사본질의 끈을 놓지 않고 차분하고 수려한 문체로 꾸준히 서사를 이끌어 가는 기법이 탁월했다. 한 폭의 그림으로 본다면 구도의 짜임. 밀도. 칼라의 톤과 완성도가 높았다. 또 일정한 서술의 속도는 전체적으로 작품의 안정감을 주었다. 

  테마라 할 수 있는 작가가 시사하는 ‘부(富/VIP들의 파티)와 빈곤(노숙 끝에 죽은 의붓아버지의 영정 앞에서의 파티)의 대칭’은 아이러니요, 냉혹하고 불균형한 현대사회의 원색대비다. 이는 우연적인 것은 아니며, 이야기를 전하는 차원을 넘어 작가의 의식意識을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하다.

  의붓 가정에서 일어나는 흉악한 사건이 사회문제가 야기되는 추세에, 친아버지처럼 정든 참 의붓아버지의 노숙 끝 죽음과, 화마 속에서 의붓어머니를 구하고 정작 자신은 죽게 되는 의붓오빠의 서사, 나’ 은혜와 생전 의붓아버지의 인간미, 최고의 파티 플래너인 ‘나’ 은혜가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의붓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어둡고 칙칙한 상복을 벗어 버리고, 밝고 예쁜 원피스 복장으로 아버지를 위한 파티의 연출은 가슴 뭉클한 메시지를 던진다. 

  <끝 장면>  영정 앞에서 그녀는 말한다.

  “아빠, 오늘 파티 즐거웠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인다.-생략- 아버지는 고깔을 벗어 놓고 구두를 신고 나가다 뒤돌아보며 엄지를 들어 올린다.

  ‘인정.’ 
 

 ◇김한창 심사위원 프로필

 2010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시아거점 몽골문학레지던스 소설작가 선정
 2011 몽골 국제 울란바타르대학 연구교수(소설강의)
 전북문학상. 노천명문학상 소설본상, 몽골문학상, 표현문학 평론상(2017)
 장편소설 : 『바밀리온』 『솔롱고』 및 『꼬막니』 전주일보 연재 
 소설집 : 『접근금지구역』 『핑갈의 동굴』
 전북소설가협회 회장역임
 현 :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전북문학관 소설창작강의 전담교수, 몽골 국제 울란바타르대학 종신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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