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잊혀진 웅치전적지 되살린다
전북, 잊혀진 웅치전적지 되살린다
  • 설정욱 기자
  • 승인 2017.11.1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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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호남을 지킨 대표적 전투지중 하나인 웅치전적지에 대한 정밀지표조사 최종보고회가 있을 예정이여 주목된다.

이번 웅치전적지 정밀지표조사는 전라북도가 의욕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호국전적지 재조명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6월 발주하여 중간보고를 9월에 시행하고, 추가조사를 포함해 최종결과를 11월22일 발표하게 된다. 지난 중간보고회(9월)시 웅치전투가 실제로 치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4지역(큰진친골, 작은진친골, 성황당터, 추정성터)이 확인된 바 있다. 또한 당시 관군의 추정진지터 2곳이 새롭게 조명되어 나주판관 이복남이 주둔한 진지와 정상부 성황당터의 은닉 및 방어시설에 대한 조사가 발표되었다.

  특히 웅치전투시 왜군이 우리나라 군병들의 충의를 기념해 만들어 주었다는 무덤지가 현 성황당터 서쪽의 구체적 돌무지라 추정해 큰 의미를 준 바 있다.

  그리고 이번 정밀지표조사는 단순히 지표조사에 그치지 않고 문헌자료와 웅치전적지 주변 지역의 폭넓은 탐문조사를 통해 구체적 지역을 추정해 보는 다각적 조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웅치전투는 1592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김제군수 정담 이하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이끄는 3,000명의 조선 관군과 의병이 왜장 소조천융경이 지휘하는 왜군 제6부대 10,000명과 싸운 전투다.

  제1·2 방어선은 나주판관 이복남과 의병장 황박이 맡았고 정담과 해남현감 변응정은 가장 높은 곳에 제3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 날의 전투에서 제3선을 지키던 정담과 군사들은 항복을 거부한 채 화살이 다 떨어질때까지 싸웠고, 최후에는 죽창 낫 등으로 백병전을 벌이다 모두다 장렬히 최후를 맞이했다.

  이 전투의 처절함은 당시 적장으로 참여한 아코쿠지 에케이 조차 후퇴 도중 웅치전투에서 순국한 조선군의 시체를 길가에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비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다.

  결국 웅치전투는 호남인이 보여준 용기와 절의로 임진왜란 7년전쟁을 이길 수 있었던 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노학기 전라북도 문화유산과장은 “웅치전투는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말의 근원이 되는 의미 있는 전투로, 충의 고장인 전북의 자존감을 대표하는 중요한 전투로 향후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고 체계적인 사업계획을 세워 내실있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설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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