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꽃
붉은 배롱꽃은 열꽃이다.
온 몸으로 뜨겁게 펄펄 끓다가 떨어진 꽃잎 자국은
헛발자국이다.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것은 금방인 꽃들은
저마다 열병을 앓다가 진다.
저물어가는 여름 끝자락에
신열을 앓다가 가는 사람이 있다.
배롱꽃처럼 황홀하게
무욕의 알몸으로 저 화엄 세상을 향해서
쉬엄쉬엄
-<배롱나무꽃> 에서, 2009
2009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여름 밤 폭죽처럼 피’었다 지고 마는 배롱나무꽃을 보면서 한때 신열처럼 열꽃으로 피었다 지는 생의 무상(無常)을 반조하며 ‘무욕(無慾)의 알몸으로’ ‘쉬엄 쉬엄’ ‘화엄의 세상을 향해’ 생의 깊이를 다지고 있다. ‘이제 40여년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하고 강단할 때가 다가온다.?그 동안 수없이 쳐 보내던 종소리도 여운만 남긴 채 허공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종은 찌그러져도 종소리만은 오랫동안 깨지지 말고 어린이들의 가슴속에 추억으로 남기를 바란다.’는 당선 소감이 이 시의 창작 배경을 짐작케 한다.
아기염소가 풀을 뜯는 사이
할머니는
그 옆에서 조알조알 졸고 있다
배가 부른 아기염소는
할머니가 깰까 봐
그 옆에서 다소곳이 엎드려 있다
염소 꼬리 같은 저녁 해가
서산으로 꼬리를 감춘다
아기염소가 그만 집에 가자고
매애~ 운다
할머니가 알았다고
하아~ 하품을 한다
할머니는 아기염소를 앞세우고
졸면서 따라가고
아기염소는 할머니를 모시고
느릿느릿 앞서 간다
-<할머니와 아기염소> 전문
할머니와 염소가 하나의 가족이 되어 화목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너와 나, 주체와 타자, 인간과 자연이 경계를 허물어 물아일체를 이루고 있는 낙원의 모습, 아니 정경(情景)이 교융된 노자의 무위자연을 연상케 한다. 이준관 시인은 ‘모두 바쁘게 빨리 움직이는 세상에서 이처럼 느릿느릿한 여유로운 풍경은 우리의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며 목가적인 그의 시풍에 주목한 바 있다.(조선일보 2016.10.5.)
어떤 아버지가 마신 술은/ 절반이/ 눈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마신 물의/ 팔 할은/ 땀이었다/ 눈물보다 땀이 더 짜다. -<불효>에서
대상을 만나는 순간 거기에서 오는 느낌, 곧 직감을 중심으로 그것을 거침없이 구어체로 풀어내기에 그의 시는 그만큼 소박하고 상쾌하다. ‘고단한 길을 가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안을 주는 시를 쓰고 싶다’는 그의 자술(시집 <<공든 탑>>- 왜, 나는 시를 쓰는가)처럼 생활 속에서 소재를 건져 올려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생의 비의와 아름다운 가치들을 매끄러운 율조로 활달하게 구사하여 강한 흡인력을 갖는다.
때로는 다소 낯 설면서도 그의 통쾌한 직관적 화두 속에서 만나게 되는 깨침의 아포리즘이 각박한 오늘의 삶에 또 하나 위로의 선물로 다가온다. (김동수: 시인,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