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곧 둥지가 되는 동심원의 미학
상처가 곧 둥지가 되는 동심원의 미학
  • 김동수
  • 승인 2017.05.25 14: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동수의 금요 전북문단 / 39.심옥남(沈沃南:1961-)

전북 임실 출생. 전주대학교 국문학과 석사 수료. 1998년 『전주일보』 신춘문예와 『자유문학』 봄호로 등단. 시집 『세상, 너에게』(1999), 『나비돛』(2007)을 발간. 전북시인상, 전북해양문학상 수상. 현재 중등 국어과 교사로 재직 중이다.

 

  아야! 지푸라기 좀 가지고 나오너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익어가는 나를

  가을 텃밭으로 불러내시고는

  쩍쩍 어깨 벌어진 배추 등줄기를

  살풋살풋 묶으신다

 

  여린 배추 그냥 놔두면

  잎사귀 제 멋대로 나풀거려

  한 해 농사 망친다고

  여며 줘야 다소곳 속 차올라

  내리치는 우박에도 덜 찢기는 벱이라고

  -<푸른 잎사귀>에서

 

  심옥남 시의 배경에는 ‘어머니의 말씀’이 있다. 어머니의 말씀이 곧 그의 삶이 되고 철학이 되고 시가 된다. ‘어린 배추 그냥 놔두면/ 잎사귀 제 멋대로 나풀거려/ 한 해 농사 망친다’며 ‘여며 줘야 다소곳 속 차오르는- 벱이‘ 그것이다. ‘내리치는 우박’ 속에서도 다소곳하게 몸을 여며 ‘속 차오른 푸른 배추’의 모습에서 인고를 감내한 수도자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남고산성 남고진 사적비를 읽다가 벌레 알껍데기 박혀 있는 진鎭 자를 보았다 수많은 글씨 제치고 지킬 진자에 꽁지 들이밀며 나방은 안심했겠지 파인 살에 동글동글 알 차오를 때 비석은 심장이 뛰었으리 깊은 상처도 누군가의 둥지가 될 수 있다고 혼신의 힘으로 알을 품었겠지[...] 비석은 깊은 골짝에 묻혀 있어도 고물고물 새겨진 발자국 끌어안고 스스로 길이 되어 세월을 건네며 행복했으리 - <아늑한 집>에서

 

  앞의 <푸른 잎사귀>에서 보여준 ‘어머니의 말씀’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파인 살(몸둥이)’에 ‘알이 차오르는’ 곧 부정의 공간이 긍정의 씨앗으로 전환되는, 그리하여 ‘상처가 ? 누군가의 둥지’ 가 되는 ‘역설의 미학’이 심옥남 시학의 기본 패턴이다.

  때문에 ‘깊은 골짝에 발 묶여 있어도 ? 외롭지 않고’ ‘ 빈 몸으로 회한에 들 때에도- 삶의 푸르른 무게 ?흔들며 겨울을 맞이할’(<겨울꽃>) 수 있었던 것이다.

 

 내 모자는 내 머리보다 크지

 내 신은 내 발보다 크지

 나보다 크지 않고는

 나를 입을 수 없는 나의 바깥들

 

 나보다 커서 나를 감싸주는 허물들

 나보다 커서 나를 빛내주는 껍질들

  -<하루하루>에서

 

  ‘나보다 커서 나를 감싸주는- 신발’처럼, 나도 누군가를 감싸주는 대기(大器)가 되고 자 한다. 기꺼이 ‘나를 감싸주는 허물들/ 나보다 커서 나를 빛내주는 껍질’, 곧 관용과 헌신으로써 누군가의 ‘둥지’가 되고자 한다. 이는 ‘無의 有用’에 대한 통찰과 그에 따른 연민으로, 이게 심옥남 시가 지향한 ‘보살 정신’이요, ‘둥지의 철학’인 것이다.

 

 돌을 던지면/강은/ 꽃을 피운다/ [...]

 상처 한 가운데서부터

 꽃잎을 지우는 강과 나//

 상처가 동심원이다.

  -<물꽃>이에서

 

  ‘닿을 수 없는 것들, -가슴과 배를 들썩여도 변방을 면할 수 없었던 나날들’(<나방이>)을 뒤로 하고, 이제 그는 세상을 감싸 ‘돌을 던져도 꽃을 피우’듯 오히려 상처를 동심원으로 승화, ‘너와 나’가 하나가 되는 화엄의 세계를 이뤄가고 있다. (김동수: 시인, 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