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춘사 나운규
[이달의 독립운동가] 춘사 나운규
  • .
  • 승인 2016.10.17 14: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춘사 나운규(羅雲奎, 1902.10.27.~1937.8.9.)

선생은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간도 명동중학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연해주를 거쳐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에서 무장 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선생은 철도·통신 등 일제의 기관시설 파괴 임무를 띤 도판부(圖判部)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다. 청산리 인근에서 독립군 훈련을 받기도 하였으나 일제가 철도 파괴 계획에 대한 비밀문서를 입수하고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선생은 1921년 3월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10월 1일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영화 <아리랑>을 제작·상영한 후 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다.

이어 <풍운아>, <잘있거라>, <사랑을 찾아서> 등을 제작하였는데, 특히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시기의 경험을 토대로 제작하였던 <두만강을 건너서>는 일제의 엄격한 검열로 제목을 <사랑을 찾아서>로 바꿔야 했다.

1931년 <말 못할 사정> 이후 제작한 영화마다 흥행에 실패하자 폐병이 재발 하였다. 병중에서도 <오몽녀>를 제작하는 등 열의를 보였으나 폐병이 더욱 악화되어 1937년 8월 9일 향년 36세로 사망했다.

일제 강점기 제작하는 영화마다 일제의 검열 가위에 잘려나가기 일쑤였지만 선생은 조선인 관객들을 울고 웃게 하면서 영화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1993년 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063-239-450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